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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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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897835 |
하나님의 기쁨
눅 15:1-10, 창조절 둘째 주일, 2016년 9월11일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옛날부터 스승들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비유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눅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3-7절)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8-10절)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둘째 아들을 잃은 아버지’(11-32절) 이야기입니다. 세 비유는 주제가 똑같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이 큰 것처럼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이 이 비유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이 주제는 예수님이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눅 15:1절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 주변에 모였습니다. 세리는 매국노 비슷한 평가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을 위해서 동족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을만합니다. 죄인이라는 말은 훨씬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당시에 심각한 질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들도 다 죄인들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사람들도 죄인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이런 죄인의 범주에 속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는 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신선하게 들렸다는 의미이겠지요.
이들과 대립되는 사람들도 이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2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은 당시 율법을 실제 삶에서 구현해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신학대학교 교수, 검사나 변호사처럼 신학이나 법을 전공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모두 율법의 전문가들로서 이들에게 의해서 유대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개인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율법주의에 갇혀 있었다는 게 불행이라면 불행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 존경받을만한 기독교인이지만 폐쇄적인 신앙의 틀에 갇히면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죄인들과 어울리고 함께 밥을 먹는 예수의 행동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눅 15:3절 이하에서 세 가지 비유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력의 성서일과에 따라서 앞의 두 가지 비유에 해당되는 본문만 읽었습니다.
한 마리 양을 잃은 양치기
첫 번째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 마리를 찾아나서야 할지, 아니면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돌보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이 사람은 한 마리를 찾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을 보았다면 양치기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칫 한 마리를 찾다가 나머지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본문의 양치기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가 그의 영혼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그 한 마리 양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길을 떠나서 결국 찾아 즐거워하면서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치기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재미있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이야기를 좀더 진행시킬 수 있습니다. 양치기가 손님들을 초대했으니 먹을 거를 장만해야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올 때는 양을 잡습니다. 양을 잡았다면 이 사람의 양은 다시 아흔아홉 마리가 됩니다. 고생하면서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은 효과가 없습니다. 이 양치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입니다. 한 마리 양이 아까워서 양을 찾으러 나갔다기보다는 잃었던 양을 찾은 기쁨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지금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어울린다고 비판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바로 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당신들 아흔아홉보다는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불편하게 들립니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에게 속하는 게 아니라 의인 아흔아홉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영적인 가르침이니까 실제로는 의인 아흔아홉에 속하지만 영적으로 죄인 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최선이기는 하지만, 죄인으로 산다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정받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두려워합니다. 가능한 많은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데서 기독교인의 내면이 분열됩니다. 한편으로는 죄인으로 살기 싫어하는 욕망이 작동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인으로서의 영적 실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힙니다. 이게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이런 딜레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의식을 안고 두 번째 비유를 보겠습니다.
드라크마 한 개를 잃은 여자
눅 15:8-10절에는 ‘잃은 드라크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양을 잃었다가 찾은 사람은 남자 양치기인데 반해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어떤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열 개 드라크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화폐 이름인데,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비슷한 가치가 있습니다.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열 드라크마라고 해도 그렇게 큰돈은 아닙니다. 당시 결혼하기 전의 여자들은 열 개의 드라크마를 실로 꿰어 목걸이처럼 만들어 지참했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를 잃는다는 건 전체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 여자가 드라크마 한 개를 기어이 찾으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시 집 구조는 창문이 아주 작아서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켜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살폈습니다. 드디어 그걸 찾아 손에 넣은 이 여자는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서 즐거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신분이 높은 여자였다면 드라크마 한 개를 찾기 위해서 이렇게 부산을 떨지는 않았을 겁니다. 어디서 잃었는지도 확실하게 아는 게 아니니까 조금 찾다가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찾은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 나온 사람도 그랬고, 소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도 그랬습니다. 다시 찾은 기쁨을 삶의 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경제논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들끼리의 예민한 파벌의식과 경쟁심리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될 수 없는 기쁨만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은 잃은 드라크마의 결론을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첫 번째 비유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세 번째 비유인 탕자 이야기에서도 둘째 아들의 회개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죄인의 회개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이런 말씀을 상투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부도덕한 언행을 뉘우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더 과격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여기면서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앞에서 말씀드린 딜레마에 빠집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를 믿어 의롭다고 인정받아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안고 사는데,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습니다. 죄인은 되기 싫지만 죄인이 안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도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삐딱하게 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전자에 속한 사람들은 죄인이고, 후자에 속한 사람들을 의인입니다. 죄인은 부도덕하면서 비양심적이라면, 의인은 도덕적이고 양심적입니다. 이런 잣대로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판단은 피상적인 겁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준은 더 근본적입니다. 죄인은 자신이 인정받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고, 의인은 반대로 인정받을만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에서도(눅 18:9-14) 이게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기도한 반면에 세리는 반대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의 소극적인 의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인 의미는 자신의 무능력에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으로 완전히 옮기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라고 해서 잘난 척할 것도 없고, 죄인과 세리라고 해서 주눅들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각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비유 안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려고 합니다. 잃은 양을 찾았다는 사실과 잃은 드라크마를 다시 찾았다는 사실이 기쁨의 존재론적 토대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야 합니다. 그건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닙니다. 양치기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에 남겨두는 모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면서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방식으로 찾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그런 숨어 있는 것을 찾아보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려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걸 찾아야겠다는 거룩한 갈망도 없고, 그걸 찾는 기쁨을 맛보지도 못합니다.
시인들은 삶의 숨어 있는 구석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술가들도 그런 눈이 있습니다. 영화감독들도 그렇습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의 에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10센티 크기의 소녀 아리에티 가족은 어느 집 별장의 마루 밑 지하에서 삽니다. 아리에티가 주인집 부엌에 각설탕 하나를 가지러 갔다가 요양 차 와 있는 주인집 아들을 만나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 삶의 마루 밑을 경험하셨는지요. 마 13:44절에 나오는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한 사람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땅속에 묻힌 보화는 볼 수 있는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다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입니다.
이것을 좀더 실질적인 것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설거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는 설거지를 빨리 해치우고 다른 일을 합니다. 돈을 벌거나 취미활동을 합니다. 설거지는 귀찮은 일이 되고 맙니다. 설거지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친 부분들입니다. 손으로 그릇을 만진다는 사실, 그리고 손에 닿는 물의 느낌을 안다는 사실은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그 숨어 있는 것들이 정말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설거지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우리 집 마당을 손질합니다. 호미질을 하기도 하고, 전지가위로 나무를 다듬습니다. 흙과도 친하게 지냅니다. 거미도 만나고 지렁이도 만납니다. 잔디와 토끼풀이 서로 경쟁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숨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와 비밀에 놀라곤 합니다. 설교 행위는 성서텍스트의 숨은 세계를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그것을 찾을 때마다 저는 설교자로서 기쁨을 맛봅니다. 피상적으로 지나가면 맛볼 수 없는 기쁨들입니다.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존재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을 만날 때 궁극적인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게 분명한 사실이라면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하는 한 마리의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입니다. 이런 설명을 의아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양치기가 바로 하나님이고, 잃은 드라크마 동전 하나를 찾는 여자가 바로 하나님인데, 그걸 거꾸로 말하면 곤란하다고 말입니다.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는 분이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기도 하면서 동시에 찾아지기를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계시의 하나님이면서 은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재산은 늘어날 수도 있고, 생활형편은 좋아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일상의 반복을 그냥 감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본문이 말하고 있는 천국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면 삶의 방향을 근본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교양인이 되거나 바리새인처럼 종교전문가가 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은 잃은 양처럼, 잃은 드라크마처럼 여러분의 인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겁니다. 그 잃은 양을 찾아서 길을 떠나십시오.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러 등불을 밝히십시오. 찾으면 하나님의 기쁨을, 즉 천상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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