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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7: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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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60993717 |
2012년 7월 1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17장 14절~20절
설교제목 : ‘산을 옮기는 신앙생활’
<영성시>
빔
- 구상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원과 맞닿아서
공(空)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제 모습을 하고 있어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나는 참나의 불멸을 실감하면서
몸삶의 덧없음이 오히려 소중해지며
더없이 행복하구나!
【그들이 무리에게 오니, 한 사람이 예수께 다가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주님, 내 아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질병으로 몹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데려왔으나, 그들은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이리로 내게 데려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셨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나가고, 아이는 그 순간에 나았다. 그 때에 제자들은 따로 예수께 다가가서 물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마태 17:14~20)】
<성경 해석의 세 가지 길>
성경 해석에는 3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언어를 사실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문자주의 해석방법이죠. 이런 해석은 가장 기초적이면서 기본적인 성서해석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언어를 사실의 기록으로 보는 문자주의 해석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바다를 가른다든가, 죽은 사람을 살린다든가, 물 위를 걸었다든가, 해가 멈춰 섰다든가 … 하는 등등의 기적 이야기가 성경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사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신학자들이 생각해낸 성서해석의 방법이 성경을 ‘문학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둘째 방법입니다. 성경은 고백의 언어이며, 감동의 언어입니다. 사실의 언어라기보다는 예술의 언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장이 섞이고, 감탄이 덧붙여지고, 대단히 주관적인 ‘평가와 해석’이 뒤따릅니다. 이런 성서해석이 문자주의 성서해석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서해석의 방법 역시 중대한 결함을 그 자체로 품고 있는데, 그것은 이렇게 성서를 해석할 경우 성서 자체가 갖고 있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경전’으로서의 정체성이 심각하게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성서의 기록을 ‘선(禪)의 언어’로 해석하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선적 체험의 결과물입니다. 기독교 역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선적 체험이라 함은, 한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깨달음의 진보’, 뭐 그런 맥락입니다. 성경의 언어를 ‘선(禪)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은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는 낯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 길이 우리 현대 기독교에 새로운 빛을 제공해 줄 것입니다. 제가 “영성은 동양적인 것이다”는 선언을 자주 하곤 했는데, 그 구체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경 이야기>
예수와 함께 했던 벗들에게 한 정신병자 아이가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벗들은 그 아이의 질병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대신 나서셔서 그 아이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내쫓아서 질병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그때 “왜, 우리는 그 아이의 질병을 고쳐주지 못했는가”를 한탄하던 벗들에게 예수께서 ‘황당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대들의 믿음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대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그대들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마태 17:14~20)
예수의 이 어록을, 혹은 귀신을 내어 쫓았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사실의 기록으로 생각하면 ‘기적’이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고, 문학적 언어라고 생각하면 ‘감동’이라는 말이 떠오를 것이고, 선(禪)의 언어라고 생각하면 ‘깨달음’이라는 말이 떠오를 것입니다. 제가 보았을 때, 이 성경의 상황은 선적인 깨달음을 촉발시키려는 구도적(求道的) 상황입니다. 특히 예수의 어록은 선가의 화두(話頭)를 연상케 하는 ‘말숨’입니다.
<결론 없는 결론>
예수는 믿음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영성에 대해서 …… 뭔가 엄청난 것을 우리에게 던져 놓았습니다. “그대들이 작디작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저 거대한 산을 들어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화두 앞에서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침묵하게 되고 궁구(窮究)하게 됩니다.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각자의 몫으로서 믿음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영성에 대해서 스스로 탐구하는 자기 수도의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나의 결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즉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도대체 뭘까요? 성경을 본다든가, 설교를 듣는다든가, 예배를 드린다든가 하는 ‘교회 생활’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거대한 산을 옮길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또 죽은 사람을 살릴 만큼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온 우주를 들었다 놓을 만큼, 저 거대한 하늘과 땅을 무너뜨렸다가 다시 세우는 것만큼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소수의 사람들이 이 궁벽한 지하 예배실에서 초라한 예배를 어색하게 드리고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이 예배는, 우리들의 무심한 신앙생활은 거대한 산을 옮기고, 온 우주를 들었다 놓는 엄청난 의식입니다. 그것을 일깨워주는 예수의 어록이 여기 있습니다. “그대들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산을 옮기는 신앙생활’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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