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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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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65578499 |
2012년 9월 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1장 1절~11절
설교제목 :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영성 시>
문(問)
/ 임인수
내가 이 문 앞에서 서서
영원을 향하는 뜻은
십자가(十字架)의 표적을 단
성당(聖堂)이 바라보이는
때문만은 아니다
울려오는 종소리
피가 돌아
온몸이 평화에
있음이로다
【그들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이르러, 올리브 산이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면 곧 내줄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 타셨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르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이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마태 21:1~11)】
<예수 이야기>
이스라엘 땅 갈릴리 호수 근처 나사렛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활동하던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아!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 모든 욕망과 모든 권력, 그리고 모든 쾌락이 들끓는 도시. 그 위험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예수께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도시로 가셨을까요? 그것은 아마 당시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치유가 필요한 곳, 즉 진리가 심어져야 할 곳이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노빈 이야기>
1983년 대만에 연구차 가있던 윤노빈 부산대 철학과 교수가 어느날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친북 인사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헤겔철학으로 무장되었으며, 그것을 또 한차례 뛰어넘어 동학과 스피노자의 생명철학을 밑에 깔고 제 나름의 철학, 저 유명한 『신생철학』을 창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 북한으로 들어갔을까요? 그이의 친구였던 김지하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이의 월북은 ‘브니엘’(하느님의 얼굴을 보다)을 남북한 양쪽에서 실천하려는 의지의 결단이었으며, 남쪽에서 올라올 민주화와 생명운동의 물결에 북한 측 나름으로 부합(附合)하려는 통일을 위한 대응 목적이 아닌가 한다.” 또 그이의 후배였던 김영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노빈의 월북은 남북의 ‘고통’을 그의 삶의 실천적 지평 속에서 커다랗게 융합시키려 했다는 것이 내 직관이자 추측이다. 요컨대 민족의 고통 현실 속에서 신생(新生)의 비전을 제시했던 윤 선생은 그 스스로 분리/지배라는 악마적 고통의 육체(=한/조선반도의 분단현실)를 그 자신의 몸으로 겪어내는 순례의 삶을 결단하고 실천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실제적으로 윤노빈 선생은 『신생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서양철학적 고민에서 민족적 고통으로’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식사 후에 이쑤시개를 버려도 좋듯, 한국 철학자들은 철학적 고민을 팽개치고 배달민족이 겪는 고통과 한반도에 엄습하여 있는 세계적 고통의 문제를 사랑(philein)하며, 이 고통의 출처와 해결책을 규명하며 제시할 수 있는 지혜(sophia)를 갖추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성서의 해석과 삶에의 적용>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윤노빈의 평양 입성은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보았을 때, 이는 대단히 밀접한-, 즉 동일한 맥락의 정신적 유대관계가 있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영성적 결단, 철학적 행위. 정신에 있어서 대단히 민감하게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이 엄습해 있는 땅에 죽음에의 위협을 무릅쓰고 들어간다는 것, 그 행동(Action), 그 열정, 그 사명,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준엄한 명령, “나는 가고 싶지 않으나 하느님께서 보내시니, 슬픔의 눈물을 삼킨 채 용감하게 들어가는” 예언자의 영성 … 그런 놀라운 ‘하늘의 정신’을 예수와 윤노빈에게서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글쎄요. 우리들 각자 나름으로 답변을 준비해야 하겠지요!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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