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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1: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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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원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166648628 |
2012년 9월 1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1장 18절~22절
설교제목 : “산을 옮기는 거룩한 힘”
【새벽에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데,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나무에게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 버렸을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벌떡 일어나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18~22)】
<이야기 셋>
오늘 이 성경 기록과 관련해서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첫째 아주 평균적인 보통의 시각으로 이 성경을 읽을 때, “예수는 졸렬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혹은 “예수는 속이 좁거나 괴팍하다”는 이야기류의 냉소적 비판입니다. 예수가 길가를 걷던 중 배가 고팠습니다. 그때 마침 무화과 나무가 눈에 띄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던 예수는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무화과에는 잎사귀만 무성할 뿐,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실망한 예수는 무화과 나무에게 저주의 언어를 쏟아냅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습니다.
아! 글쎄요. 무슨 거창한 신학적 이론에 무지(無知)한 사람들은, 혹은 무신 신비한 언어게임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순박한 사람들은 이 성경 기록을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둥합니다. 아니 이럴 수 있는 것인가요? 아니 이래도 되는 것인가요? 무화과 나무가 예수의 배고픈 배를 채워주지 못하자, 예수가 그 나무에게 잔인한 저주를 쏟아냈다는 이 기록은 씁쓸한 것입니다. 거기에다 온갖 현란한 이론과 비유를 제 아무리 갖다 붙인다해도, 그것은 아닙니다. 이 성경 기록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예수는 졸렬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마땅한 변명과 해명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그래서 저 역시 답답하고 씁슬한 마음으로 이 성경기록을 읽습니다. 훗날 어떤 적절한 메시지로 이 성경기록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볼 뿐입니다.
둘째, 예수의 황당한 저주를 목격했다는 그의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집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 버렸을까?" 하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예수의 황당한 저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거나 비판의 견해를 제시하기 보다는 ‘놀라움’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이 역시 씁쓸한 대목입니다. 예수의 저주에 대해서 평균적 보통의 양식을 갖고 있는 제자라면 정중하게라도 의문을 제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놀라움’으로 화답하며, 예수에 대한 드높은 추앙을 위해서 이 사건을 활용했습니다. 【예수는 멀쩡하던 생나무도 말라죽일 수 있는 신묘한 능력의 존재다.】 이 실망스러운 대목에 대해서 저는 적절한 해명을 할 능력이 없습니다. 현재로서는 그래서 훗날 어떤 적절한 메시지로 이 대목을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볼 뿐입니다.
셋째, 예수는 오늘 성경기록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마태 21:21)】 예수는 선언하기를, “제대로 된 믿음은 산을 바다로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아주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에 듭니다. 해석과 해명, 설명과 해설의 여지가 많은 좋은 문장(文章)입니다. 예수가 갖고 있는 매력 있는 사상 혹은 느낌을 단어로 연결하여 의사를 전달하는 최소의 단위로서, 예수의 이 선언은 명문장(名文章)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조금 자세하게 해볼까 합니다.
<믿음 이야기>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산더러 '벌떡 일어나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마태 21:18~22)】 글쎄요. 예수의 이 선언을 문자 그대로 읽을 수는 없겠지요. 뭔가를 상징하고 함축하고 있는 문장(文章)이지요. 그게 뭘까요? 어떻게 해설해야 할까요?
저는 예수의 이 문장을 접하면서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 생각났습니다. 즉 어리석은 자가 산을 옮긴다는 중국 고전의 이야기입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항산(太行山) ·왕옥산(王屋山)은 둘레가 700리나 되며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있는 산이다. 두 산 사이 북산(北山)이라는 곳에 살고있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세에 가까운데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흙을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는 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지수(智搜)가 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하고 대답하였다. 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산을 허무는 인간의 노력이 끝없이 계속될까 겁이 나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들어 옮겨,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두산백과)】
예수는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 하셨고, 중국 도가사상(道家思想)의 대표자였던 열자는 “어리석음이 산을 옮긴다”고 했습니다. 저는 두 분의 선언이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 한마디 더 붙여서, “예언자적 광기(狂氣)가 산을 옮긴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설교의 결론>
하늘의 사람은 어떤 이여야 할까요? 그것은 하늘의 뜻에 대한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며, 그 마음이 순진무구(純眞無垢)하여서 거의 어리석기까지 한 존재이며,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무모한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예언자의 광기(狂氣 혹은 光氣)를 갖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산을 옮기는 거룩한 힘”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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