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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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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7장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하셨을까?
① 사람들이 남의 말을 자꾸 하여 싸움이 자주 일어나니까?
②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을 향해 너무 비판을 해서 사랑이 없어지니까?
③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하여 너무 비판을 많이 하니까 하나님이 듣기 싫으셔서?
④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헐뜯어 전도문이 그만 막혀 버리니까?
⑤ 네가 남을 비판하면 너도 남에게 똑같이 비판을 당하게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 틀립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모두 비판하고 판단하고 평가를 하는 그런 성분이 들어 있는 인간입니다. 좋게 비판하며 좋게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고, 나쁘게 비판하여 나쁘게 판단을 내리는 것도 있고, 벌주기 위해 비판 판단하는 것도 있고, 상을 주기 위해 비판 판단하는 것도 있고, 남을 헐뜯고 정죄를 하기 위한 비판 판단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물건이 무겁다, 저 물건이 무겁다’ 할 때 저울이 있어야 하듯이 비판 판단을 하려면 기준 척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준 척도를 가지고 했느냐 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 세상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기준, 그 지식을 가지고 삽니다. 말하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먹는 것 전부는 아담 타락 후의 기준입니다.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기준적인 지식은 없습니다. 전부는 육에 대한 기준적인 지식, 전부는 물질에 대한 기준지식, 전부는 눈에 보이는 기준지식, 전부는 임시적인 기준지식을 가지고 삽니다.
영원한 영에 대한 기준적인 지식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네가 왜 나를 해롭게 하느냐? 너 그러면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는 이것이 하나님 기준, 진리기준에서 나온 말이냐, 인간 자기기준에서 나온 말이냐? 자기에게 육신의 고통을 주니까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하는 말이냐, 자기의 영에 손해를 주니까 즉, 구원손해를 주니까 하는 말이냐?
‘비판하지 말라’
누구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냐? (선악과 먹은 지식을 가지고!)
① 선악과 먹은 인간기준, 세상기준, 지식을 가지고 비판을 하면 비판을 받는다. 누구에게? 타락된 인간에게 비판을 받고. 왜? 비판하는 자기를 남이 볼 때 틀렸으니까 하나님에게도 비판을 받는다. 왜? 비판하는 척도가 틀렸으니까!
그래서 인간기준, 세상기준(도덕성 기준, 물질성 기준, 권세, 명예, 영광성, 이력성, 업적성 기준 등)을 가지고 비판 판단 구별하여 가르친다거나, 비판 판단하고 평가한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② 이제 그 인간기준을 가지고 진리를 가진 성도를 비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성도로부터 비판을 받고.
③ 그 인간기준 척도를 가지고 하나님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비판하면 주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고 비판을 하고 정죄를 하더니 역사적으로 심판을 받고 만 것입니다.
영을 위한 영적인 것이 아니면서 세상 육적을 위한 비판 판단은 자기가 그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깨닫게 하는 비판성은 자기가 혹 잘못이 있을지라도 그 가르치는 말만큼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입니다.
7장 2절: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너희의 헤아림으로’
헤아림은 가늠하여 생각하는 것, 미리 짐작하여 생각하는 것, 자기 생각의 기준을 세워놓고 마음으로 평가를 하고 측량을 하고 판단을 하는 것. 예를 들어 ‘분명히 시장 간다 그래 놓고 가는 길에 사교댄스 방에 들어갈 것이다. 들어가면 분명히 미스 유가 그 곳에 있을 것이고, 같이 춤을 추다가 2차로 맥주 홀로 갈 것이고, 3차는 어디로 또 갈 것이다. 시장에 가서 한 두 가지 사오면서 맨날 늦게 들어오는 것이 수상하다’ 또는 동네에 새로 생긴 술집에 손님이 많다고 해서 왜 많은지 알아보았더니 젊은 과부야. 그래서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생각하며 ‘지금쯤 그 술집에 들어가서 어쩔 것이다, 저쩔 것이다.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는 이런 것이 다 큰 병입니다.
신앙 면에서도 ‘내가 금식기도를 이렇게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교회의 1년 예산 짜는 것도 인간기준, 자기기준으로 지레 짐작을 해 하나님을 측량하는 것입니다. 인간 틀 속에다 집어넣는 것, 하나님을 자기위치 자기권 안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을 해서 주려는 것이 크겠느냐, 인간기준, 조그마한 머리통 속의 자기 헤아림이 크겠느냐? 설교도 보면 인간 자기의 헤아림이 많습니다. 인간 타락기준, 물질기준, 사건기준, 육의 기준, 보이는 기준, 응답기준 전부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목적이 없습니다. 전부는 인간 제 목적입니다. 신적 도덕성의 차원 높은 온전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기준 척도를 가지고 비판을 받을 짓도 말아야 되고, 헤아림을 받을 짓도 말아야 되고 하나님의 진리기준 척도로 올라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비판을 하다가 치고 받고 싸움질이 나오고, 헤아리다가 마귀시험에 걸리고,(의처증이 나오고, 의부증이 나오고) 모든 지혜 지식성이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올라가지 아니하면 모두 죄판이 됩니다.
7장 3절~5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형제의 눈 속의 티, 네 눈 속의 들보. 들보가 크냐, 티가 크냐? 하나님 앞에 죄가 크겠느냐, 인간 앞에 죄가 크겠느냐? 불신세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는 전혀 의식을 못하고 인간 앞에서의 죄만 의식을 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인간의 죄를 보는 눈과 타락한 인간이 인간의 죄를 보는 눈은 같은 것이 아니고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믿는 자기가 세상 인간들이 보는 죄의 의식을 기준하여 본다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왈가왈부하게 됩니다. 즉 자기의 눈 속의 들보만한 티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눈 속에 이것이 들어 가리어진 줄 모르고 있으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뺄 수 없습니다. 즉 형제의 죄를 지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눈 속에 작은 티가 있는 자가 눈 속의 들보를 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척도, 인간의 기준성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의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를 말할 수 없는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들보가 가리어진 것입니다. 이 죄를 모르고 교인들의 행동 죄만 보고 지적한다면 고쳐지지도 않거니와 고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자기가 타락적 기준적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면서 타락적 기준적 지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지적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웃기는 소리지요. 근본적으로 틀려 나갔는데!
타락된 인간의 도덕성을 기준을 삼아 성경을 역시 도덕성으로 가르친다면 이것은 전부는 구복주의 외식주의 신비주의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렇게 속화된 것은 근본적으로 성경을 보는 기준적인 지식이 틀린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교역자들은 이것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7장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여 네 눈 속에서 들보부터 빼라’
눈으로 보는 자기지식의 기준성, 마음으로 보는 자기지식의 기준성, 신앙으로 보는 자기지식의 기준성.
자기가 지금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의 개념인지 육의 개념인지, 하나님의 기준척도인지, 세상 인간의 기준 척도인지? 어느 척도의 개념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지 분명히 분별을 하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7장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거룩한 것은 거룩한 사람에게 필요하고,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에게 필요하고, 거룩한 것은 거룩을 아는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거룩하게 살고자 하고 구별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주십니다. 개라는 놈은 거룩한 것, 속된 것을 모릅니다. 물고 찢고 싸우고 정조도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르고 본능으로만 사는 것이 개입니다. 인격성장도 모르고.
이런 말씀을 왜 우리 인간보고 말씀을 하실까? 그러니까 문제는 이 말씀을 듣는 즉시 지금 자기가 어떻게 살고자 원할 것인가? 거룩한 사람으로 살고자 원하는가, 아니면 개와 같은 사람으로 살고자 원하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기를 개처럼 취급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에게는 몽둥이입니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돼지는 짐승으로 배만 고프면 꿀꿀거리고, 우리에 갇혔어도 배만 부르면 잠자고, 살만 찌면 돼지는 돼지의 가치로서 알아줍니다. 그리고 살이 빨리 찔 수록 세상 잔칫상에 빨리 올라갑니다. 그러나 돼지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런 생각도 지능 있는 사람이 할 줄 알지!
진주는 보석인데 이 보석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의미하고, 보석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또한 진주처럼 귀한 존영자가 되라는 뜻도 있습니다.
돼지는 진주를 모릅니다. 그 가치성도 모릅니다. 돼지는 행주 씻은 구정물이라도 주면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살찌고 비대해지면 OK입니다. 딴 소원은 없습니다.
개나 돼지는 모두 세상을 향한 이단자들을 말함인데 성경에 이단자들은 사두개당파(행5:17)로 이들은 영이고 부활이고 없다고 하며 현실만족주의로 사는 자들입니다. 또 바리새파(행15:5, 26:5) 사람들인데 이들은 율법주의자로서 영도 부활도 천사도 메시아도 다 믿습니다. 성경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믿고, 전통과 정통을 자랑하는 당시 전 세계가 다 알아주는 세력 있는 보수파 신앙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에 들어 있는 죄를 지적하니 그들은 성경을 들고 예수를 저주하고 예수를 죽였습니다. 후에 사도들의 전도에 따라 다니면서 개처럼 헐뜯고 훼방을 하고 핍박을 하고 괴롭혔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신앙의 중심사상인 인간중심 인본주의 세상주의 구복주의 지상천국주의 신앙자들이 자기들을 구원할 진리이치의 신앙을 버리고, 진리의 거룩한 것을 발로 밟고 무시하고 돌이켜 대적하여 대드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단자들이요, 외식자들입니다.
우리가 현실위주로 땅의 것, 세상 것을 목적하여 살면 주님께서는 개처럼 취급을 하시고 돼지처럼 취급을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보화를 가치 없게 여긴다면 이는 육적 현실만족주의로 사는 인간 돼지이니 진리의 보화를 주지 말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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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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