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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요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16 추천 수 0 2017.02.09 22: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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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욜2:23-32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jys.jpg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욜2:23-32,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16년 10월23일

 

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24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25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26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7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구약의 선지자들 중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은 여러분이 이름을 몇 번씩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들에 비해서 요엘은 무명에 가까운 선지자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문건인 구약 『요엘』은 겨우 세 장에 불과합니다. 66장 분량인 이사야나 52장 분량인 예레미야와 비교가 되지 못합니다. 요엘은 평범한 선지자이지만 신약성경이 그의 설교를 두 번이나 인용할 정도로 초기 기독교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요엘이 선지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생태적인 위기를 맞았습니다. 큰 흉년이 들어서 먹고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욜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가 먹었도다.” 본문에는 네 가지 곤충이 언급됩니다.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입니다. 모두 메뚜기의 일종이겠지요. 해충으로 인한 것이든, 전쟁으로 인한 것이든 한 해의 농사를 망친다는 것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욜 1:10-12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을 테니 다시 들어보십시오.


들판은 망그러지고 밭은 메말랐다. 곡식은 다 떨어졌고 포도주는 바닥이 드러났으며 올리브기름은 말라 버렸다. 기가 차느냐, 농부들아? 포도원을 가꾸던 자들아, 울어라. 밀이나 보리뿐이랴, 거두려던 곡식이 모조리 없어졌다. 포도덩굴은 마르고 무화과나무는 시들었다. 석류나무, 대추나무, 능금나무 할 것 없이 들판의 나무들은 모두 시들었다. 모든 사람에게서 기쁨은 사라졌다.

 

현대 도시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은 이런 글을 읽어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느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거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극심한 자연재해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처럼 ‘정말 안 됐네.’라거나,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하는 정도의 마음만 들뿐입니다. 생존의 위기를 직접 격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있지만, 그걸 무조건 최상의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삶의 극한적 실존을 망각함으로써 영혼의 위기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면서 두 가지의 극한적 실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가 성찬식을 집행할 때 가끔 언급한 내용입니다.


첫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젠가 때가 되면 먹을거리를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하는 생태적 대재난을 맞습니다. 45억년 지구 역사에서 이런 대재난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빙하기의 도래입니다. 그럴 때마다 유인원들을 비롯해서 지구의 수많은 생명들이 멸종되었습니다. 지구는 앞으로 인류가 버텨낼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빙하기를 맞을 수도 있고,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하는 행성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걸 외면할 수 있을까요? 둘째, 개인들은 곧 더 이상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순간을 맞아야 합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개인의 죽음은 인류의 멸종과 마찬가지로 그 개인에게 대파국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순간이 아주 빨리 닥친다는 사실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극단적인 실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기쁨이 사라졌다.’는 요엘 선지자의 외침은 먼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칠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걸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몰라서 마음이 잠시 편할지는 모르겠지만 옳게 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다만 그게 현실로 다가오지 않아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심각하게 생각하긴 하지만 별다른 뾰족한 해결의 길이 없으니 가능한 그 사실을 외면한 채 매일의 일상에 파묻혀져 지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요? 세상을 창조하고 보존하며 완성하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극한적인 대재앙의 상황까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만 오늘의 삶이 의미 충만한 것으로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엘이 이런 대재앙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좀더 따라가겠습니다.

 

요엘은 대재앙 앞에서 탄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요령을 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우니 이집트나 바벨론으로 잠시 피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돌아오자는 말로 대중들을 설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망하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조롱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2:21절에서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외쳤고, 더 나가서 22절에서는 들짐승들에게까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도대체 요엘의 이런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욜 2:25-27절을 다시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나 너희에게 갚아 주리라. 너희에게 보냈던 대군, 메뚜기, 누리, 황충이, 풀무치가 먹어 치운 햇수를 세어 갚아 주리라. 이제 너희는 한껏 배불리 먹으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찬양하리라.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 준 이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그제야 너희는 알리라.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너희 하느님은 이 야훼밖에 없다. 내 백성은 언제까지나 당당하리라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엘의 설교를 들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을까요? 위로를 받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았을 겁니다. 위로를 받는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로를 받는 시늉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위로를 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은혜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이라서 쉽지 않습니다. 세상살이의 여러 가지 일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그런 일에 모든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와께 돌아가면 지켜주신다는 말이 귀에 들어오기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1)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것은 두 가지가 될 수 없습니다.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믿고 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인생이 더 잘 풀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월등히 좋았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시련을 더 많이 당했습니다. 도대체 요엘 선지자는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만사형통 해결사처럼 선포하는 것일까요?


2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요엘은 여호와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즉 그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표현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계산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지켜주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자동응답 기계처럼 이뤄주는 분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정작 필요한 것인지,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잘 모른 채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세상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대재앙을 만났지만 유일무이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지켜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엘의 영적 통찰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그런 확신과 믿음을 통해서만 크고 작은 재난과 시련이 없을 수 없는 이 세상을 우리가 버텨낼 수 있습니다. 이런 확신과 믿음으로만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대재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에서도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통찰에서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게 될 것이라고, 온 세상에서 당당하게 될 것이라고 반복해서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좀 멀리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골치 아픈 일이 많고 배가 고픈데 어떻게 배부르게 될 미래를 내다보면서 노래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이해가 되지만 거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품격은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세상과 인간과 삶을 향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각은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시인들이 더 잘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문학 평론가 황현산의 시화집 『우물에서 하늘 보기』 머리말에 나오는 글 한 토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시를 비평해오면서 무언지 모를 이 극단적인 것에 관해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그것을 ‘시적인 무엇’이라고 단순하게 뭉뚱그려 부르면서 마음이 어떻게 시적 상태에 이르는지 설명하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심정이 한 자락 노래를 타고 날아오르듯 약동하고, 삶의 어떤 매듭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몽환에 휩쓸리고,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시적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동력과 연결된 모든 것들을 말한다. 그 동력은 정신이 집중된 시간에도 나타나고 심신이 풀려 자유로워진 시간에도 솟아올라 내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이 아님을 알려주곤 한다(9쪽).

 

‘정신이 문득 소스라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각성에 이르던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라는 표현을 저는 궁극적으로 영혼의 각성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바로 선지자의 영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런 영혼의 각성으로 요엘 선지자가 어떤 말을 했는지 들어보십시오. 28절과 29절입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영을 부어준다.’는 표현이 여기서 반복됩니다.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이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장래, 꿈, 이상은 다 현실 너머의 종말론적 시각을 가리킵니다. 종말이라는 단어를 현대인들은 어색하거나 뜬구름 잡은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런 오해를 받을만한 현상들이 교회에서 종종 일어나곤 했습니다.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주장이 그런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문자적인 차원에서의 휴거와 불심판을 말합니다. 실존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종말을 도피처로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도 없고, 변혁에 대한 관심도 없이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처럼 무조건 세상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런 생각은 성서가 말하는 종말사상에 대한 왜곡입니다. 종말론적인 시각은 생명 완성의 순간을 향한 열망이자 설렘이자 희망을 가리킵니다. 그런 열망과 설렘을 아는 사람은 역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명 충만하게 바뀌는지를 부단히 생각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치열하게 그런 일에 참여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런 종말론적 시각을 32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바울도 롬 10:13절에서 요엘 선지자의 설교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상투적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깊은 산속이나 골방에 들어가서 목이 터져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외친다거나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갈망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며, 예배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요엘 신학에서 본다면 그것은 묵시적 갈망입니다. 그런 묵시적 흔적이 3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묵시문학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느니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한다.’는 표현을 잘 보십시오. 세상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 오히려 크게 긍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혁이 사람의 편에서는 실제로 두렵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룬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춘기를 겪으면서 청소년들은 극한의 불안한 어떤 것을 경험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고 있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때도 우리는 어떤 근본적인 상실감이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성경의 축자영감설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도 그걸 쓴 이들의 인간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청천벽력으로 들을 겁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에 교황무오설이 깨지는 것을 그렇게 받아들이겠지요. 그런 경험들이 비록 두렵겠지만, 진리에 이르기는 길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더 궁극적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요엘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안식월 휴가를 독일에서 지냈습니다. 몇몇 도시를 다니면서 공동묘지에 여러 번 들렸습니다. 집사람은 꽃으로 단장된 공동묘지가 마음에 드는지 거기에 묻히고 싶다 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고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공동묘지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가장 가깝게 실감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도 곧 그런 운명에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공연히 겁을 주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운명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만 구원에 가까이 가거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걸 인식하면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요엘은 ‘남은 자 중에서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만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내다보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이 저주스러운 운명의 십자가에 달렸다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완성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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