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16:19-31 |
---|---|
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6.8.14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 |
누가복음 16장에 있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 대문밖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전신의 헌데를 핥아대는 개들과 함께 먹고 자면서 생활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이 부자에게는 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쓰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죄를 물으셨습니다. 무슨 죄를 물으셨을까요? ‘무관심’이라는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부자는 산해진미로 배불리 먹으면서도 자기 집 대문간에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도 주변에 어려운 이웃들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이 부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관심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6년 데이비드 샤프(David Sharp)라는 등반가가 혼자 에베레스트 등반에 도전했다가, 8500미터 지점에서 저체온 증으로 쓰러졌습니다. 다른 등반팀 40여 명이 그 옆을 지나가면서 죽어가는 그를 보았지만 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저체온증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 조난자를 지나갔던 등반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한 몸도 버틸 힘도 없었기 때문에 그 한 사람을 돌봐줄 수 없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어쩌면 지금의 사회가 조난자를 그냥 지나치며 등반하는 사람들의 형편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두들 나 혼자도 먹고 살기 힘든데 이웃을 돌보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웃이 죽어가고 있는데 모른척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될 것입니다.
1. 무관심한 사회
우리는 참으로 무관심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곳에 수년을 살아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심지어 이웃이 죽어나가도 모릅니다. 요즘 노인이나 홀로 사는 사람들이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2015년 전국 무연고 사망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에서 1254명이 혼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또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2년 719명, 2013년 878명, 2014년 1008명 등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최근 4년 동안 약 50%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사이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유품을 정리해주는 새로운 직업까지 생겨날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하고 내버려두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5절에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이 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으며, 세리나 창기와 같이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던 사마리아 여자가 정오의 뜨거운 뙤약볕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던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함께 음식을 먹고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9∼30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수를 다 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숱이 많아도 주님은 그 머리숱을 다 헤아리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과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해 주실까?’라는 질문이 가슴에서 우러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10장 31절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세심하게 돌보시고 계십니다.
관심의 힘은 대단합니다. 나는 어떤 부형님의 간증을 듣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사업을 한다면서 너무 바빠서 가족들을 등한히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중에 부인이 암에 걸려서 암이 온 몸에 퍼져버린 것입니다. 부인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가정에 무관심했던 남편은 아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집사람을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성령께서 “관심을 기울여주라. 네 아내를 그냥 내동댕이 쳐놓았기 때문에 저렇게 되지 않았느냐. 관심을 기울여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한 후, 그날부터 아침에 자고 깨면 세숫대야에 세숫물 떠 놓고 아내의 얼굴을 씻어주고, 그 다음 밥을 지어서 직접 밥도 숟가락을 아내의 입에 갖다 먹여주고, 목욕통에 물 데워서 목욕 시켜 주고, 옷도 입혀 주고, 아내 옆에 앉아서 찬송가를 불러주고 기도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무슨 쇼를 하느냐. 이런 짓을 언제까지 하는지 두고 보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그렇게 하고, 두 달이 지나도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 남편은 ‘결판이 날 때까지 내 무관심의 죄를 회개하고 부인에게 보답을 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으로 계속 한 것입니다. 부인이 가만히 보니 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결국 부인은 남편을 사랑하게 됐고, 마음에 기쁨이 들어오게 되자, 사는 데 희망이 생겨나 그만 암이 낫게 됐다는 간증이었습니다. 남편이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을 표현하니까 그 부인이 암을 이기고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약은 없다”고 간증을 한 것입니다. 저는 그 간증을 읽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베풀면 암뿐만 아니라 어떤 병도 물러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을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42절을 통해서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은 사람의 눈에 보잘 것 없고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함께 나누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있으면 세상이 따뜻해지고 살맛이 나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
빅토르 위고의 작품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한 어부와 가족은 초라한 오두막살이었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폭풍우가 치는 밤이었습니다. 아내는 바다로 나간 남편이 걱정이 되어 부둣가로 나갔습니다. 부둣가는 자신의 집 건너 이웃집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둣가를 가는 길에 있는 이웃집에 과부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이웃집에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아주 귀한 보화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주인이 죽었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그만 그 보화를 훔쳐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다 과부 집에서 훔쳐 나온 보화를 잘 놓고 다시 남편 오는 것을 기다리려 부둣가로 갔습니다. 아내는 과부의 집에서 훔쳐온 것을 남편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되어 몹시 불안해 했습니다. 남편이 돌아오자, 일단 이웃집 과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고아가 된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니 당장 데려다가 우리가 키우자”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들은 아내는 남편을 데리고 침실로 갔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매우 놀란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바로 죽은 과부의 아이들이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훔친 보화가 바로 고아가 된 아이들인 것입니다. 참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아닙니까? 훔치려면 이런 보화를 훔쳐야지 은이나 금이나 돈을 훔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웃의 불행을 보고도 외면하고 모른 척 합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은 달라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웃과 나누어가지며 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로 18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6장 18절로 19절에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듯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참된 생명을 취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 15장 13절, 14절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까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나눔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누어 주고 나누어 갖는 것을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향해 웃으시는 것입니다.
오래전 미국 헐리우드 제일장로교회에 유명한 외과의사가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조선에 가서 병원을 개설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짐을 꾸려서 배를 타고 조선이라는 나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미국의 담임목사가 그를 만나기 위해서 배를 타고 조선에 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의사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그 의사선생은 한 소녀를 수술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는 기다렸다가 수술을 하고 나오는 자신의 교회의 성도였던 외과의사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신이 미국에서 이런 수술을 하면 얼마를 받습니까?”
“500달러에서 700달러 정도를 받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조금 전에 수술 한 어린 소녀에게서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그러자 의사가 대답하기를 “미국 돈으로 몇 센트 밖에 안 됩니다. 몇 전 밖에 못 받았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눈을 크게 뜨고 “몇 백 달러를 받을 환자들을 두고서, 동전 몇 푼도 안 되는 돈을 받기 위해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크게 웃으면서 “돈보다 돈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그 때문에 조선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제가 돈이 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몇 푼의 돈만 받고 수술을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웃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잠언 19장 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야훼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13장 16절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시듯 우리가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로 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 그 죄인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회개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노력하신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홀로 서 있는 나무는 바람이 거세게 불면 뿌리 채 뽑힙니다. 폭풍우가 불어오고 난 다음에 가로수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있는 것은 뿌리가 아무리 깊이 내려가도 외로운 뿌리는 그냥 뽑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숲에 있는 나무들은 폭풍우가 불어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숲을 이룬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엉켜져 서로서로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여간한 바람에도 끄떡없는 것입니다.
나무를 휘어 감고 올라가 칡넝쿨이 상당히 나무를 조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큰 비가 지나가면 칡넝쿨이 감겨있는 나무는 까딱없고, 자유로운 나무는 모조리 다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평소에 감겨 있으니깐 보기에는 괴롭게 보이지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니깐 나무를 휘어감은 칡넝쿨이 이 나무를 붙잡아 주는 것입니다. 칡넝쿨도 살고 나무도 사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평소에 이웃과 서로 주고받고 사랑하고 살면 귀찮고 성가신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다가오게 되면 홀로 있는 사람들은 낭패를 당하고 쓰러질지라도, 이웃에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어 둔 사람은 서로 붙들어주고 도와주기 때문에 이겨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 거센 풍파를 이길 수 없지만 숲의 나무들처럼 서로 껴안고 살아가면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고 모두 다 함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동안에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에서 사랑이 무엇이냐면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자랑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무료급식에 나서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밥 못 먹는 사람에게 아침밥을 지어서 먹게 해주는 밥퍼 교회의 사랑이 세계 다른 교회들에게 큰 모범과 칭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에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없어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이 우리 사회를 밝고, 맑고, 환하게 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동안에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처럼 소외되고 외롭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이웃들에게 무관심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섬겨서 우리를 향해 웃으시는 주님의 웃음소리가 들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순복음가족신문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