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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죄가 없다.”
“박근혜는 죄가 없다.”
탄핵기각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선천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이다. 총으로 정권을 빼앗고 저항하는 이들을 탄압하고 심지어는 목숨을 빼앗는 정치만 보고 자란 그녀에게 민주주의의 DNA가 있을 수가 없었다. 개념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존재 자체가 불행이지.
한국인들 중에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DNA가 없는 이들이 많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촛불 시위에 가담한 사람을 사회 불만 세력으로 치부하는 경향이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미국이 역할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는 알 리가 없고 6.25, 미국의 경제원조만 생각해서 미국에 대해 정신적인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 DNA가 없는 사람들이 유난히 성경을 들고 나오기를 좋아한다. 헌법재판소에서부터 시청 앞 광장까지 그들이 들고 나온 각가지 성경구절들은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하기야 성경구절을 부적처럼 사용하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에게 제일 인기 있는 부적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욥8:7)라는 구절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쓰여 있다고 모두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것이다. 그 구절은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사실은 욥의 친구인 빌닷이 쫄딱 망해 버린 욥에게 시비 걸고 비꼬는 말로 '네가 청결하고 정직 했다면 왜 망했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니까 마귀의 조롱의 말인 것이다.
아미쉬의 집에는 성경책이 없고 일상에서 성경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성경은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마차에 실어 놓고 예배 보는 날 사용한 후 또 마차에 보관한다.
그들이 성경공부를 장려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겸허한 자세를 흩트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간단하고 명쾌한 것인데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지 않으면서 그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의적인 해석에 매달리는 것 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검소하고 순종적이며 겸손한 생활을 강조한다. 그들은 기독교인의 자세로 ‘순종’과 ‘겸손’ 그리고 ‘간소함’을 강조하며,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을 그들 공동체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그들에게 종교적인 삶이란 성경책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소박하고 검소하며 감사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교회에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고 또 성경 많이 읽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이 쓰여진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전후 문맥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은 영양가 없는 마치 끼니 마다 Fast Food으로 식사를 하는 꼴이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했지만 안창호 헌법재판관은 장문의 ‘보충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가 성경구절(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를지어다-아모스 5장 24절-)”을 인용했다고 해서 나는 ‘판사가 블랙코미디를 하나?’ 했다.
성경에 있는 좋은 말씀이라고 해서 아무나 써 먹으면 안 된다. 그 구절은 터지고 깨진 입장에서 정의를 목말라 하는 이들이 부르짖을 때 인용할 수 있는 구절이지 힘을 가진 재판관이 쓸 말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안 재판관이 통진당 사태를 대역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할 때는 정의가 말라 붙었단 말인가?
통진당의 경우에는 현재에 의해 해산된 후 대법원에서 RO의 존재 등 헌재가 당 해산에 결정적인 이유로 들었던 이른바 '증거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대법원은 헌재의 판단이 틀렸다고 판결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정의는 마침내 승리 한다.’식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사실은 대부분은 불의가 승리한다. 정의는 어쩌다가 한 번씩 승리할 뿐이다. 이번 헌재 판결도 정의가 승리했다고 보기 보다는 촛불을 든 국민들의 압도적인 힘으로 결과를 얻은 것뿐이다.
역사상 중요한 시점에서의 승리나 위인들의 업적은 그들의 선함과 위대함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힘의 우위, 그리고 다소의 운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힘을 너무 쉽게 선으로 착각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항상 승자에 의해 쓰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역사는 선과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 편이 더 상황을 유리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게 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진 것도 현실적으로 불의가 승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또 역사적으로 불의한 세력에 이용당해 왔다. 이번에 탄핵반대 집회에 한 몫 단단히 하던 기독교인들의 행태를 보아도 그렇다.
예수의 십자가가 불의가 아닌 정의의 길이라는 역설은 등 따숩고 배부른 처지에서는 이해가 될 수 없고 스스로 고난 속에서 정의롭게 살 때만이 입증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은 밥 먹고 사는데 만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조직의 쓴맛’ 이 아닌 ‘정의의 쓴 맛’을 보면서 살았다. 그것은 쓰디썼다.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 자기를 정화하는 투쟁 즉 지하드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한 겨울의 추위를 촛불로 이겨낸 민중들은 스스로 자기를 정화하는 제사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당당뉴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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