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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18: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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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8.27 성암감리교회 |
오, 아도나이!
창18:1-4
한 번 더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 셋이 자기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 모르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장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서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심지어 땅에 엎드려서 절을 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오 주님! 만일 당신께서 나를 좋게 생각하신다면 제발 당신의 종을 지나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어느 장면 또는 어느 대목이 눈과 가슴에 와 박힙니까? 저는 먼저 ‘사람 셋’이라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분명 아브라함이 본 것은 ‘사람’이고, 사람임을 확증하는 숫자 ‘세 명’입니다. 그러니까 천사라든지 ‘하나님 같은’ 기대적 존재를 본 게 아니라 그저 자신과 같은 사람 세 명을 본 겁니다. 그래서 ‘사람임에도’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냥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이상 인 것처럼 장막 어귀로 달려 나가 맞이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같은 사람 셋을 보자 아브라함은 사람 이상인 것처럼 그들을 맞아들였다는 겁니다. 세 번째 장면은 어떤 것일지 여러분이 한 번 말해 보세요. 그렇죠. 그 보통 사람들에게, 낯선 사람들에게, 들어오겠다고 그들이 청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애써 불러 들여놓고서 그들에게 절을 했다는 대목이 아닙니까? 참 이상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다음에 그는 자신의 이모든 행위,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 것과, 그들이 어쩌면 이상하게 여길 절을 한 행위가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밝히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오, 주님! 만일 당신께서 나를 좋게 생각하신다면 제발 당신의 종을 지나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을 찾은 낯선 자들은 분명 ‘천사’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3절에서 이들을 ‘아도나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뜸 ‘아,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이었구나’하고 간단히 넘어가지만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나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사막을 걷다가 지쳐 집으로 찾아온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대접한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아니면 측은한 마음으로? 이 에피소드를 매개로하여 아브라함의 아내는 나이 80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게 될 거라는 약속을 부여받습니다.
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항상 착한 마음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나, 아브라함의 시대는 우리의 시대와 다릅니다. 사회학, 철학, 과학, 종교 같은 건 궁리도 하지 못하던 시대입니다. 그저 인간이라면 어떤 마음과 태도로 사는 게 인간다운가 하는 생각만 있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나온 답이 ‘인간은 모름지기 착해야 한다’입니다. 착하다는 게 뭐냐? 카인과 같지 않은 거고(반대로 아벨과 같은 거고)지금 지나가는 나그네를 모셔 들이기에 극진한 아브라함 같은 것이 착한 것입니다. 그 착함이 하늘을 움직이는 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나이 80에 아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아내가 수태를 하는 것은 ‘낯선 자를 정성껏 모신’연유입니다. 앞에서 나그네들을 ‘아도나이’하지만 이 말은 ‘한 집안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옛날 같으면 아버지가 그 자식들의 ‘아도나이’인 거죠. 이게 우리가 말하는‘주님’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낯선 사람들을 ‘오, 주님’이라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극진하게 여긴다는 거죠. 사실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 나 외에 모든 낯선 사람들이 나의 ‘아도나이’즉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낯선 사람들을 마치 자기 집안의 호주처럼 여긴다는 아브라함의 됨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평소에 사람을 신처럼 신실하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이 ‘종’은 ‘에베드’라고 하는데 ‘신을 경배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신처럼 떠 받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을 ‘주의 종’ 어쩌고 하는 건 그가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떠 받들 때’가능한 호칭이지 종교의 권력이거나 계급으로서 쓰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신에게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신과 같이 대하는 존재였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이고, 이게 ‘종’입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종이고 당신은 나의 주인입니다. 이런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낯선 세 사람에게 절을 하며 하는 말의 뜻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낯선 세 사람을 대접하는 행위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인 동시에 사람에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아브라함의 처신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더러 ‘주님, 주가 어디로 가시던지 나도 따라 가겠다’는 말이 어디서 출발 했는지,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 대하듯 하라’는 말씀의 뿌리는 어딘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근원적 교훈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진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 낯선 세 사람이 모두 나의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종처럼 여기고 모든 상대적 존재를 하나님(아도나이)으로 하는 인간 의식 혁명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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