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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4: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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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996) |
예수님이 주신 5대 복 (누가복음 4장 16-21절)
< 바른 진리의 편에 서십시오 >
최근에 대학 때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 변화를 실감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대학 때 진보적인 입장에서 열심히 데모하던 동창생들이 지금은 보수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왜 나이가 들면서 보수적인 입장이 될까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회적 위치가 높아지거나 소유가 많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상층부를 형성하면서 그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보수적인 생각의 틀이 형성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젊을 때는 원석 때입니다. 때가 덜 묻고 직장생활과 사회생황의 경험이 적어서 정의감과 선 의식을 가지고 무조건 약자 편에 서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책임적인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약자를 무조건 동정하는 것이 약자에게도 좋은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그의 잘못된 생활태도가 약자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함을 많은 인생 체험과 사람 체험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는 것보다는 바른 편에 서는 것이 정의임을 깨달으면서 사상 변화가 이뤄지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은 각 가정에서도 쉽게 목격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를 비교하면 부모는 아무래도 자녀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 쉽고 자녀는 아무래도 부모보다 조금 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기 쉽습니다. 그런 현상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인식과 인정도 없이 좌우측 진영 논리를 따라 지나친 편견을 가지거나 지나치게 적대감을 가지면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 편에 서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성장배경과 인격성향과 사상성향에 따라 좌측 혹은 우측 입장을 선호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늘 바른 진리 편에 서려고 해야 합니다. 자신이 좌측 성향이라도 좌측 인사가 잘못했으면 옹호하기보다 잘못했다고 하고 자신이 우측 성향이라도 우측 인사가 잘못했으면 옹호하기보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바른 진리 편에 서서 집단 지성이 집단 정신병을 극복해 바른 사회를 만드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최대 가치로 여기지만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개념을 ‘불의도 용납하는 사랑’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랑이 불의도 용납하는 사랑이라면 예수님이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이 그냥 구원하면 됩니다. 또한 고난과 죽음이란 장치를 마련하실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다 구원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기독교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숭고한 사랑’이란 뜻이지 ‘불의도 용납하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공의를 수반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사기죄로 붙잡혀 법정에 섰습니다. 그는 끝없이 자기 죄를 부인하며 물 타기를 했습니다. “저는 사기를 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돈을 벌어주려고 했습니다. 남들도 보통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부인하다가 결정적 사기 증거가 나오자 그때부터 판사가 신실한 장로인 정보를 입수하고 읍소 전략으로 나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신실한 장로 판사니까 회개한 줄 알고 무죄를 선포해야 합니까? 눈물을 참작은 하되 죄에 맞게 선고하는 것이 그 죄인을 바르게 만드는 진짜 사랑입니다.
그렇게 판사가 법과 양심에 따라 징역을 선고하자 그 죄인의 부모가 말합니다. “아니! 신실한 장로가 왜 저렇게 정이 없어? 어느 교회 다니는 장로야? 사랑도 못 배웠나?” 그렇게 말하는 부모는 사랑이 많은 부모입니까? 그런 불의한 사랑이 오히려 자녀를 망칩니다. 사랑은 불의를 은혜로 덮는 것이나 용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내세워 불의 편에 서지도 말고 진영 편에 서지도 마십시오. 진리 편에 서서 사랑을 내세우십시오.
경제적으로도 부자 혹은 빈자 편에 서지 말고 바른 진리 편에 서십시오. 그런 기본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그 힘을 약자를 위해 사용하십시오. 물론 그 약자가 마음이 높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는 필요합니다. 높은 마음에 힘이 더해지면 더 마음이 높아져 망하는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늘 겸손한 약자를 돕겠다는 마음을 품고 힘과 능력을 기르고 소유와 자리도 추구하십시오. 그렇게 겸손한 약자와 함께 하려는 삶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임을 본문은 잘 말해줍니다.
< 예수님이 주신 5대 복 >
어느 날,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관례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섰을 때 누군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자 이사야 61장 1-2절을 찾아 읽었습니다(16-17절). 그 말씀을 읽고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고 앉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20절).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 성육신하신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심으로 본문 17-18절에 언급된 5가지 삶의 축복이 온전히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주신 5대 복이 무엇입니까?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 복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태어나 거기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신 이유는 그곳이 당시 가장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제자도 갈릴리 사람 중에서 선택하셨습니다. 가난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난할 때 심령이 가난해지면 복음에 더 열리고 믿음은 더 뜨거워집니다. 가나안의 축복은 가난한 심령을 통해 얻어집니다. 더 나아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축복 받은 성도는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늘 살펴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 유명한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수시로 우울증이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사람들은 “즉시 정신과 의사를 찾으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메닝거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집에서 나와 철롯길을 건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도우십시오. 자신에 몰입하지 말고 타인의 삶에 참여하십시오.” 우울하고 공허하면 그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인생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준비하십시오. 그때부터 공허함과 우울함이 소리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2.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는 복
복음은 각종 매인 삶에서 자유를 줍니다. 병으로부터의 자유도 줍니다. 병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병들었을 때 인생과 진리를 깊이 알고 성숙해지고 진실해질 때도 많습니다. 더 나아가 병을 회개 기회로 삼으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면서 치유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증대됩니다. 신유는 구원을 따르는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와 같습니다.
병 외에 사람을 얽매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기주의에 얽매여 결혼이나 출산도 기피합니다. 무지도 사람을 얽매는 것입니다. 무지 때문에 사이비에 속박되어 이름도 맘대로 못 짓고 이사도 맘대로 못하고 결혼도 맘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복음의 축복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와 운명과 죽음과 공허함과 정신적 허약함에 매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자기를 얽매는 나쁜 습성들과 힘써 맞서 극복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극복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3.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하는 복
예수님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주셨습니다. 특히 영안이 바르게 열리길 원하면 말씀을 가까이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도 말씀을 보고 기도할 때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씀을 사랑할 때 행복을 얻고 말씀을 잘 지킬 때 용기와 지혜와 소망을 얻고 말씀의 약속을 통해 영안도 얻고 평안도 얻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을 보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영안이 열릴 때 어떤 희생도 감수하게 됩니다.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신비하게 미래의 일을 맞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돈을 많이 벌어도 문제입니다. 돈과 함께 불행의 씨앗도 찾아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아도 반드시 미래는 복된 미래가 됩니다. 그처럼 영안이 열린 삶을 통해 미래의 축복을 준비하십시오.
4.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복
이 복은 정신적인 병이나 스트레스에서 자유를 주시는 복을 뜻합니다. 사실 눈에 보이는 1차 질병보다 마음속의 2차 질병이 더 심각합니다. 마음을 찍는 엑스레이가 있어서 마음을 찍으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빨갛게 멍들어 있을 것입니다. 요새 50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가 죽음을 앞두고 이혼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50년간 한을 품고 살았으면 그 나이에 이혼합니까? 복음은 그런 한으로부터 자유를 줍니다.
쓴 뿌리의 한이 있으면 자기 문제에 대해 남부터 비난합니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쳐서 미래를 망치는 것이 바로 쓴 뿌리의 한입니다. 쓴 뿌리의 한이 잘 극복되지 못하면 판단력을 잃고 가시 돋친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입술 관리도 중요하지만 내면 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입술의 말은 내면 상태보다 더 좋게 되기 힘듭니다. 과거의 아픔을 잘 털어낼 줄 알아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습니다.
5. 주의 은혜의 해가 전해지는 복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뜻합니다.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은 매 50년마다 빚진 자들의 빚이 탕감되고 노예들이 해방되고 땅의 경작까지 쉬게 하는 ‘해방의 해’를 뜻합니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삶’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삶’을 뜻합니다. 그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려면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고통의 터전에서도 사랑과 용서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용서는 영혼 치료약입니다. 용서받을 때 치유 받고 용서할 때 더 치유 받습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를 멀리하거나 이별할 때도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는 마십시오. 용서하고 깨끗이 잊어야 자기 영혼과 육신이 살고 자기 가정과 인생이 삽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용서하기 힘들어도 이성이 말씀에 순종해 작동하고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용서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축복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곳곳에 수많은 모습으로 감춰져 있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주변에 전파하는데 힘쓰십시오.
< 영혼구원에 힘쓰십시오 >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는 잃은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설교입니다. 그만큼 잃어버린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한 사람이 불행해지면 그 불행이 전염병처럼 퍼질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도 중요합니다. 실핏줄 하나만 막혀도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작은 막힘과 아픔을 우습게 알지 마십시오. 작은 한이 큰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처럼 잃어버린 겸손한 한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잃어버린 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과 모든 만남을 전도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전도의 기회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약사님은 약봉지에 이런 글을 써 놨습니다. “육신의 병은 좋은 약국을 만나면 끝나고 마음의 병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난다.” 저희 사역을 많이 돕는 한 의사 선생님은 병자에게 늘 천사처럼 전도합니다. 그처럼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전도하십시오. 전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앞으로 죽으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전도의 사명을 다했는가를 통해 심판을 받고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은 최고의 칭찬과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는 새 신자가 오면 어떻게 해서든 그를 쫓아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교회의 묘지가 서른 개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혼구원에 관심도 없이 자기 안락만 추구하는 삶처럼 비극은 없습니다. 자신의 삶과 소유를 다 걸고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전파입니다. 돈을 신처럼 여기며 살지 마십시오. 돈을 힘써 벌되 영혼구원의 최종목적을 달성하려고 버십시오. 그런 삶이 없으면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 됩니다.
예전에 지금 가치로 몇백 억 원의 재산을 가진 77세의 할머니가 자살했습니다. 자식들이 재산 문제로 싸우면서 늘 자기 돈을 빼 갈 궁리만 하고 남편까지 외도하니까 삶에 염증과 외로움을 느껴 자살한 것입니다. 나눔의 행복에 대한 의식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도 나눔의 행복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생긴 비극입니다. 돈은 여유가 되면 자녀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남겨주십시오. 그래도 교육할 때는 자녀들에게 유산을 받은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미리 교육하십시오. 그래야 늙었을 때 부모를 돈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봅니다.
며칠 전에 한 한의사가 모교에 1300억 원을 기부했습니다. 학교에서는 그분의 이름을 붙인 의료 연구기관을 만든다고 합니다. 이름을 내려고 기부한 것은 아니겠지만 학교가 그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손들이나 후학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겠습니까? 가끔 보면 은밀한 헌신자가 천국에 가면서 남긴 유산으로 선교센터가 세워지고 뜻있는 선교사업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도 좋은 이름으로 오래 기억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인생의 결말입니까?
사명이 망각된 돈과 직위와 권세와 능력은 자신과 자식을 망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복음전파와 영혼구원에 기쁘게 사용해야 참된 행복이 주어지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도 축복하십니다. 자신을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핵심적인 기대와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전도의 사명을 염두에 두고 해야 하나님께서 지혜와 창조성과 기회를 주십니다. 그처럼 자신의 모든 삶을 은혜와 접목시키고 영혼구원과 연결시킴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데 일조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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