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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6 추천 수 0 2017.04.12 2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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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7: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2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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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9 


변형

마 17:1-9, 주현 후 여덟 번째 주일, 2017년 2월26일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어느 날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제자들은 거기서 특별한 현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었습니다. 그 변형을 마태복음 기자는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빛’이 변형의 핵심입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그 자리에 등장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받은 인물이고, 엘리야는 초자연적 능력이 출중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로부터 3천5백 년 전에 살았던 모세와 8백 년 전에 살았던 엘리야가 그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이상한 현상을 목도한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초막을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은 엉뚱합니다. 실제로 산위에서 계속 지내고 싶다는 말은 아닐 겁니다.


그 순간에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장면이 다시 바뀝니다. 갑자기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산 정산은 일기가 불순하니까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구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나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이 소리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던 순간에 들렸던 거와 비슷합니다. 마 3:17절은 이렇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상상이 되지요? 산은 사람들에게 어떤 신비로운 것을 느끼게 합니다. 거기서 제자들은 이상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엎드려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이상한 현상이 말끔히 사라지고 이전처럼 예수님만 자신들 앞에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절). 세 명의 제자들은 이 경험을 가슴 깊이 간직했을 겁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경험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 이야기는 나중에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1)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건가, 하는 궁금증일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도 빛과 같이 희어지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고, 빛난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일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무슨 마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꾸민 허황된 이야기일까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세 전승에도 나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왔습니다.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을 들고 내려옵니다. 그 장면을 출 34:29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는 사람들이 불편할까 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습니다. 행 9:1절 이하에 따르면 예수믿기 전의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바울이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 전승에도 나옵니다. 엘리야의 그 유명한 승천 장면에 불 수레와 불말, 그리고 회오리바람이 나옵니다(왕하 2:1-18). 고대인들은 어떤 특별한 경험을 빛, 소리, 불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걸 신문이나 티브이 뉴스 보도처럼 읽으면 오해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변형에 대한 마태복음 기자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관점으로만 보는 건 잘못입니다. 그렇게만 보는 건 추상적인 겁니다. 그 중심으로 들어가면 더 중요한 것을 경험합니다. 김춘수의 시 ‘꽃’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조병화는 ‘산수유’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순간, 나는 그 노란 허공에 말려/ 나를 잃는다./ 아, 이 황홀/ 잃어 가는 세월이여.’ 꽃만이 아닙니다. 그 중심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이 우리에게 놀라운 ‘사건’이 됩니다. 바람도, 아이들 웃음과 울음도, 설중매도, 초승달도, 그리고 안개와 먼지도 황홀한 사건이 됩니다. 그중에 가장 큰 경험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을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2) 제자들이 예수님을 특별한 존재로 경험했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구름 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 소리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울린 소리와 똑같습니다. 제자들의 경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대목만이 아니라 전체가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심판의 주님이라고, 구원의 주님이라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통해서 제자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으니 설교자는 그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죄와 죽음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힘입니다. 그걸 단순히 질병이나 부도덕성이나 폭력 같은 것으로만 좁혀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눈에 세련되고 교양이 고상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는’ 것들까지 다 포함한 이야기입니다. 죄와 죽음의 힘은 자본주의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소유로써만 삶을 확인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와 체제가 바로 죄와 죽음의 힘입니다. 그것이 정치와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작동되고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로 살거나 더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늘 세상이 말하는 겁니다. 그런 것뿐이라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선입견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해방을 경험했듯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한 출애굽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만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될 생명이 궁극적으로 부활이라는 사실은 여러분이 다 알 겁니다. 부활이 뭐냐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변화 산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암시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그 변형이 빛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빛으로의 변형이 곧 부활입니다. 빛은 물리적 성질의 그 빛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에 대한 은유입니다. 빛 자체가 핵심이 아니라 본질적인 변형이 핵심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생명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변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자기를 고수합니다. 자기에게 갇히는 겁니다. 우리는 다 부활 생명으로의 변형을 기다리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꽁꽁 묶여서 삽니다. 자기를 잃을까 하는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자신을 확대함으로써만 만족해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부활 생명이 제공하는 해방과 평화는 불가능합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십시오. 여러분이 죽으면 바람이 되고, 빛이 되고, 흙이 됩니다. 완전한 변형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부활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될 겁니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잃으면서 어떻게 해방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지, 앞이 막막하다고 느껴질 겁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 경험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초적 생명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예수의 부활 장면에서도 천사들은 반복해서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원초적 생명 경험은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본질은 변형입니다. 모든 것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형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을 테니, 옳은지 생각해보십시오. 개체 인간의 몸은 계속해서 순환되고 변형됩니다.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생물학적인 생명 현상을 보십시오. 태아는 어머니 자궁 안이 편안하다고 해서 거기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나와서 자랍니다. 세포가 생기고 떨어져 나갑니다. 몸집이 크고 정신도 깊어집니다. 그리고 늙습니다. 늙는 거는 생명의 한 과정입니다. 늙어 보이기 싫은 분들은 주름살 펴는 보톡스 주사를 맞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의료적인 성형도 필요하고 미용 시술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매달리는 건 삶을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저의 딸들이 사춘기 때 저에게 머리 염색을 하라고 성화였습니다. 염색을 해서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겠지만 그거와 전혀 상관없이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뿐이기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환갑이 넘은 여자 분의 얼굴이 18세 소녀처럼 젊어 보인다면, 그게 정말 좋아 보이는 걸까요? 늙음을 두려워하면 부활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식물도 변형됩니다.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트고 줄기와 잎이 나며 꽃을 피웁니다. 때가 되면 그게 말라서 죽고 씨를 맺습니다. 그 씨가 다시 싹을 틔웁니다. 그 과정에 햇빛과 물과 땅과 온갖 균들이 다 작용합니다. 생명은 그야말로 변형의 변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더 크게는 지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문제이지 그대로 영원무궁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강도 변하고, 산도 변하고, 지구 자체도 변하고, 우주도 계속 해서 팽창됩니다. 이런 변형의 과정과 더불어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미래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설교 내용이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당장 취업과 결혼과 출산과 취미생활에 마음이 쏠려 있어서 우주의 변형과 그 미래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물리학이나 철학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인간과 세계를 말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 창조와 그 완성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걸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바로 그것 한 가지를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라고 말입니다. 변화 산에서 제자들이 경험한 것도 궁극적으로 세상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완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계 21:1,2절은 이렇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우주 전체의 변형을 가리킵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이런 구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한 것과 같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4) 변형으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밀입니다. 마 17:5절에서 예수님은 하산 중에 제자들에게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9:30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을 고친 뒤에도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궁극적인 것은 비밀이며, 이 비밀은 말로 듣는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밭에 묻힌 보화에 대한 비유를(마 13:44)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화가 땅에 숨겨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보화를 우연하게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밭에 보화가 숨겨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밀입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겉만 보고 피상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 수고하면서 찾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당장은 대단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나놓고 보면 다 하찮은 것들입니다.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도 평생 교회 성장에 목을 매고 살다가 목회를 끝냅니다.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목회로는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생명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중요하지 않은 것에 삶을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생명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비밀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비밀이 탈(脫)은폐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이 빛으로 변형된 사건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빛은 곧 부활 생명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언젠가 빛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형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이 잡힐 겁니다. 지금의 ‘나’는 고정불변의 ‘나’가 아닙니다. 꽃으로 변형될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씨앗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초라해보여도 영적으로는 생명이 가득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부활 생명으로 변형되는 순간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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