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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민12: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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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016) |
온유한 강자가 되십시오 (민수기 12장 1-10절)
< 빛 된 리더가 되는 길>
본문은 리더의 권위를 존중하는 삶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흔히 “사람은 선해도 사람들은 악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성이 있는 개인도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서 파당을 짓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자리에 욕심을 내면서 영성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남매는 출애굽의 영웅이었지만 그들 사이에도 리더십 문제로 암중의 시기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은 늘 어두운 구석이 있습니다. 성도는 어두워져가는 세상에 빛 된 리더를 꿈꿔야 합니다. 그런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아내 십보라와 사별한 모세가 구스 여자와 재혼했습니다. 구스 여자는 피부가 검은 에티오피아 계통의 이방 여인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러 잡족이 같이 출애굽 했는데(출 12:38) 구스 여인은 그 잡족 출신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가 신분이 천한 흑인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비방했습니다(1절). 그 기록에서 미리암의 이름이 아론보다 앞서 나온 것은 그 비방을 미리암이 주도했다는 암시입니다. 결국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도 그녀가 비방의 주체임을 추정케 합니다.
미리암은 이방인과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순혈성 유지를 위해 가나안 7족속과의 통혼을 금했지만 성경을 보면 이방인과의 결혼이 절대 금기사항은 아니었습니다. 훗날 간간히 있었던 이스라엘의 종교개혁에서 내세웠던 이방인과의 결혼 금지 계명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민족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조치로서 절대 계명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모세에 대한 비방은 지나친 비방이었습니다.
살다 보면 모세처럼 부당하게 비방을 받기도 합니다. 어디든지 상습적인 비방자는 늘 있습니다. 부당한 비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린도 교회에는 4개의 파당이 있어서 다른 파당에 의해 사도 바울조차 반대와 비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세우고 죽도록 헌신한 교회가 반대하고 비방할 때 인간적으로는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전 4:3).”고 했습니다. 판단 받는 일을 큰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열심히 교회 일을 했는데 “당신 좀 그만 설쳐!”란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속상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욕은 안 먹지만 그것이 최선은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면 그릇을 깨기도 하지만 그래도 설거지를 하십시오. 물론 교회 일을 할 때 비방의 대상이 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비방을 받았다고 금방 맡은 직무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사명 이행에는 늘 십자가가 따름을 알고 위로 대신 비방을 받아도 사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복된 인물이 되려면 비방의 벽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2. 함부로 비방하지 마십시오
모세를 비방할 때 미리암과 아론이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2절).” 물론 미리암도 여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했고 아론도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출애굽 사역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전체 리더로 세우셨기에 개인의 능력과 영성과 혈통을 내세워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좋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리암이 징벌을 받았습니다.
남의 비방에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지만 남을 비방하는 것은 더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생활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판단하고 비방하는 태도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판단력이 없어 판단을 주의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수록 문제 해결은 더 멀어짐을 알기에 판단을 주의하는 것입니다. 당시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면서 구스 여인이 비천한 신분과 검은 피부색도 비방거리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미리암을 징벌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네 얼굴 흰 것이 그렇게 자랑이더냐? 더 희게 만들어주고 아예 꽃도 그려 주마.”
하나님은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기부터 성찰하기를 원하십니다. 상황이 힘들어지면 핑계와 변명과 판단이 많아지는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녹차가 뜨거운 물에서 맛을 우려내듯이 어려울 때 참된 책임적인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공동체가 힘을 발휘하려면 리더의 회복도 중요하지만 자기의 회복도 중요합니다. 자신도 일종의 리더라고 생각하고 자기 회복부터 시도하십시오. 자기를 살피지 않고 남을 쉽게 판단하면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 탓을 하면 겉으로는 의롭게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속으로는 괴롭게 됩니다. 성공은 능력과 관련되지만 행복은 성격과 관련됩니다. 판단과 비방은 행복 속에서도 불행을 느끼게 하지만 칭찬과 감사는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 자기가 변해야 상대도 변하고 세상도 변합니다. 항상 자기 변화를 먼저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판단과 비방은 줄고 칭찬과 감사가 많아지면서 행복도 얻고 리더의 축복도 얻습니다.
3. 도전에 온유하게 대처하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미라암을 징계하셨습니까? 모세가 분노의 눈빛으로 미리암과 아론을 향해 레이저 광선을 쏘지 않고 온유하게 대처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으로 강하게 나서면 하나님이 나서서 조치하지 않고 자기 힘을 절제하고 온유하게 대처하면 하나님이 나서서 조치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 모세는 미리암과 아론의 비방에 대해 온유하게 대처했습니다. 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3절).”
모세는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의 비방을 받았어도 속을 부글부글 끓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인내하면서 오히려 “누님과 형님이 저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이 다 보시는데.”라고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의 표식을 신비한 은사나 현상으로만 여기지 마십시오. 모세처럼 참기 힘들 때 온유하게 대처하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모세의 그런 대처에 대해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이 땅에 어떤 사람보다 낫다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온유함이 최고라고 언급하지만 실제로 모세가 반역한 백성들에 대해 무서운 심판을 내릴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온유함이란 무조건 허물을 덮어주는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온유한 마음은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잘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닮은 모습은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입니다.
리더에게 온유함은 필수조건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약 이백만의 백성을 인도할 때 백성들의 수많은 불평과 반역 속에서도 꿋꿋하게 가나안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 힘은 온유함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내면의 온유가 넘쳤기 때문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고 온유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기도 응답과 기적적인 은혜는 인내의 터전에서 펼쳐집니다.
4. 하나님의 조치를 신뢰하십시오
모세가 온유한 대처를 보고 하나님께서 직접 어떻게 대처하셨습니까?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고 하셔서 셋이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4절). 그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해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불러 그 두 사람이 나아갔습니다(5절).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6-7절).”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2가지 통로에는 ‘환상으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꿈으로 선지자와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환상과 꿈’이 아닌 ‘직접 대면’이라는 방식으로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회막 일에 충성한 것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이 말씀은 충성스런 교회 리더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언뜻 보면 예언자, 선지자, 능력자, 치유자라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평범한 교회 목사보다 사람들 눈에는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회 일에 충성하는 평범한 목회자를 더 소중하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리더를 놔두고 기적적인 은사를 보여준다는 집회나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은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나 시각과 괴리된 채 신기한 기적을 쫓아다닐 때 문제가 끊이지 않고 더 병들고 이단에 넘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막 주관자와 같은 위치에 있는 교회 목회자를 소중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단들은 대개 환상과 꿈을 앞세우지만 하나님은 명백한 말씀을 앞세우는 것을 더 중시하십니다.
하나님은 회막 주관자에게 명백한 말씀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나타나게 하시기에 회막 주관자인 충성스런 모세를 비방하는 것은 두려운 행위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 진노를 표출하시고 떠나셨습니다(9절). 그와 동시에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눈과 같이 되었고 아론은 즉시 미리암이 나병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10절). 얼마나 무섭고 즉각적인 조치입니까? 그런 하나님의 조치를 신뢰하고 온유하게 대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과 기대를 결코 어긋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온유한 강자가 되십시오 >
온유한 대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끌어내는 핵심 통로입니다. 온유한 대처에 익숙해지려면 성령충만과 더불어 꼭 필요한 것이 ‘내적인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내적인 힘이 있고 자기 안에 콘텐츠가 준비되어 있으면 마음을 다스리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그때 높은 자리에서 쉽게 내려올 수 있고 남이 물러나라고 할 때도 쉽게 물러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자리에 집착합니까?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거의 다 빼앗긴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에 어떤 권력 자리보다 더 큰 자기만의 콘텐츠가 준비되어 있으면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많은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닌 ‘짐을 덜어 홀가분한 것’이 됩니다. 그때는 초대형 교회 목사 자리나 권력자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고 그토록 허무한 묘수를 쓸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성도는 정치적인 삶에 몰입하기보다 자기 내면의 콘텐츠를 갖추는 삶에 몰입해야 합니다. 자기 콘텐츠를 잘 준비하면 어떤 세상 자리에서도 홀가분하고 온유하게 물러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 물러서면 하나님께서 친히 진격의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부당한 공격에도 온유하게 반응하면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심으로 온유하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변합니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란 무조건 덮어주는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부드러움 중에도 강단이 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런 참된 온유를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온유하면서도 힘을 길러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이 온유하게 나올 때 거기서 참된 감화력과 리더십이 나옵니다. 선하게 사용할 힘도 갖추어 온유한 강자가 되십시오. 권력보다 실력이 더 중요합니다. 권력이 주는 힘은 잠깐이지만 실력이 주는 힘은 수명이 깁니다.
이슬람 국가(IS)라는 단체가 지금까지 참수, 화형, 총살, 익사 등의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모르는 집단 같지만 이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악한이나 독재자 중에는 겁쟁이가 더 많습니다. 겁이 많으니까 불안감 때문에 정적 제거나 사상통제에 그토록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담대한 사람이나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정적을 무자비하게 제거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IS가 미국에도 테러 위협을 가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두려움을 모르는 모습일까요? 내막을 깊이 살펴보면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미국이 정말로 진노해서 전면공격에 나서면 북한과 IS는 순식간에 괴멸됩니다. 그래도 미국이란 무자비하게 힘을 행사하지 않는 나라인 것을 아니까 IS가 그토록 큰소리를 치지만 IS가 위협하고 건드리는 것을 금기시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가장 원수처럼 여길 수도 있는 이스라엘은 왜 건드리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미국과 달리 민족적인 박해를 오래 받았던 역사적인 피해의식이 있기에 그들을 위협하거나 공격하면 세계 여론도 신경 쓰지 않고 엄청난 보복을 가합니다. 그런 무서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 참수하거나 총살했다는 얘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힘과 강단이 잔인한 IS 무리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하는 요소입니다.
힘과 강단이 있어 보이는 것은 필요합니다. 사랑과 용서를 앞세우되 힘은 힘써 기르십시오. 상대의 부당한 공격을 잘 방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부당한 공격을 가할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힘 있고 강하고 단호하게 보이는 모습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서 악한 세력이 함부로 알거나 우습게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법도 때로는 무섭게 보여야 범죄가 조금이나마 줄어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에 힘을 기르고 그 힘을 선용하면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자기를 준비하지 못하고 힘을 기르지 못해서 무시되거나 부당한 폭력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힘없이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것은 참된 온유가 아닙니다. 무조건 당하는 것을 십자가로 여기는 잘못된 십자가 콤플렉스를 버리십시오. 힘을 기르되 그 힘을 절제하면서 온유하게 사용하십시오. 온유한 강자가 되어 사랑과 온유로 행할 때 사람도 감동하고 하나님도 멋지게 역사하셔서 선한 열매가 많이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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