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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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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11장 20절~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 이 고을들은 갈릴리호수(바다) 주변의 고을들인데 이 고을들 주변에서 이적과 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벳새다에서는 소경을 고쳐서 보게 했고, 오병이어의 이적이 있었고, 가버나움에서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었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었고, 그리고 각색 병자들을 고쳐 주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의례히 이적 기사가 일어날 줄 알고 그것을 구경하려고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헐뜯기 위해 따라다녔고, 예수의 제자들은 깨달으려고 따라 다녔고. 그러니 소문이 퍼지면서 온 고을들이 예수의 소문으로 떠들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고을이든 들어가시면 말씀을 주시고, 이적 기사도 보여 주시고, 선지자도 보내시고 하심에는 주님의 바라심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어느 한 고을에 참 교회가 선다면 그 온 동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어느 한 가정에 참 진리의 성도가 있다면 온 가정이 진리의 가정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11장 21절: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그 만큼 시간을 쏟고, 힘을 기울이는 사랑을 쏟고, 전 인격을 기울여 했는데 복음을 받는 자들은 주님을 맥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물질투자, 애정투자를 했는데 자식이 학교는 안 가고 술집에서 여자들하고 희희덕 거린다면 부모가 맥이 빠질까요? 차라리 부모 없는 고아를 데려다가 길렀다면 고맙다는 말이나 하지! 물질투자, 시간투자, 노력투자를 했는데 장사가 안 되면 맥 빠질까요?
주님을 힘 빠지게 하는 사람, 주님을 힘 빠지게 하는 교인, 주님을 힘 빠지게 하는 자식, 주님을 힘 빠지게 하는 교역자가 많을까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등지에서 각종 병 나음이 많다는 것은 병 나음을 받은 간증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주님을 만난 자들이 다른 고을들보다도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없습니다.
육신의 병 고침을 받은 이 자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당사자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영의 눈으로 다시 재발견을 해야 합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정신이 있어야지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고을사람들의 그 정신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로 아니 됩니다. 기본적으로 주님을 만났어도 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화를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회개한 신앙이라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삶의 목적을 세상으로 향하던 것을 이제는 천국으로 향하여 구원을 잘 이루어 가겠습니다’ 하고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자에게 성령의 역사는 떠나는 것입니다. 죽은 신앙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11장 25절~27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셨는데 누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느냐?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말하자면 자문자답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즉 ‘너희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성경을 읽었으면 너희들도 스스로 그런가 안 그런가 자문자답을 해 봐라’ 하는 말입니다.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께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어린아이들인지, 어른인지 생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은 당시에 뭘 안다고 하는 서기관, 율법사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모세오경 율법을 가르치는 종교교사들, 그리고 세상경험이 많은 어른들. 당시의 종교교사들은 히브리원문도 잘 알고, 헬라원문도 잘 알고, 성경역사도 잘 압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한 가지를 가르쳐주면 열 가지를 알 것 같고, 열 가지를 가르쳐 주면 백 가지를 알 것 같은데, 설령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숨기시더라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성경 학박사요, 경험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을 척척 잘 알 것 같은데 그들이 하나님께서 숨기신다고 숨긴 것을 못 찾아내겠느냔 말입니다.
아이들은 앞으로 많이 배우고 경험을 하고 자라야 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세상경험이 많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가르침이 필요가 없습니다. 가르침을 안 받으려고 합니다. 잔머리 잘 굴리고, 꾀를 잘 내고, 의견을 내어서 말하고,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당시의 지혜롭다고 하는 그들은 왕을 업고 있습니다. 세상을 경험한 지식과 종교적 체험과 율법적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판단하려 듭니다. 나사렛 예수는 시골 촌뜨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날 때도 누구의 아들인지 말이 많았고,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주로 무식한 어부들로 학위가 있나, 건물이 있나, 재산이 있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오신 이유는 모른 채 단순히 현실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기준이 되어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나타내 줄 수 있을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 예수를 부인한다 치더라도 그가 하는 일이라도 믿어야 할 터인데 그가 하는 일까지 믿지를 않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계시를 나타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조직과 덩어리에 등을 기대고, 왕을 등에 업고, 명예 영광에 등 기대고 있는데, 이런 자들은 영적 무형적 영의 일을 부정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계시를 나타내 줄 수 있겠습니까? 땅에서 나온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세상경험이 어른만큼 없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말, 자기 생각을 붙여 말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오직 계시 받은 것만 말할 수 있으리라! 주님이 보여주신 그것이 전부니까 보여준 그것 밖에 없으니 그 말만 하게 됩니다. 어른들은 자기 자랑이 많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들려주는 대로 그대로 들어갑니다.
11장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실 때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소원 목적이 무엇인지, 취미가 무엇인지, 간구성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아들을 인격적으로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본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 목적이 무엇인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 아버지의 의사와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마음을 모르고,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데 계시를 무조건 보여 달라고 하면 보여주느냐?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었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아들에게 가면 알 수 있고, 아버지의 것을 얻으려면 아들에게 가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에게 잘만 보이면 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의사 단일성으로 통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아버지의 마음에도 들고, 아들의 마음에도 들고. 계시를 받는 자만 아버지를 압니다. 계시를 받지 못하면 아버지를 모른다는 말이고, 따라서 아들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인간에게 있는 어떤 세상요소적인 조건을 보고 계시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아무나 무조건 달라는 자에게 계시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본다면
① 말씀을 영접하여 회개를 하고 방향을 다시 잡고,
② 하나님의 의사성을 즉, 뜻을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계시라 할 때는 이미 성문화된 계시가 있습니다. 계시가 성문으로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성문계시 미완성 때처럼 ‘이것이 성경이다’ 하고 음성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다시 주지 않습니다. 지금도 그런 것을 받았다고 성경처럼 말하는 것은 사단 마귀의 짓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문계시 속에 은밀계시가 있습니다. 이 은밀계시를 알아야 하나님의 의사성을 알게 됩니다. 그런고로 성경을 역사적인 개념으로만 알고 최종적 결과적 영원 궁극적 실력에 의한 그 효력을 보지 못하면 현실세상에서 이루어질 구원을 다 놓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고 충성봉사한 것은 다 헛것이 됩니다. 예수 믿은 효력이 없어집니다. 세상성이 어린아이들처럼 찌들지 않은 그들에게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창세기 1장 27, 28절에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는 수고가 있고,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축복의 수고요,(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 이 축복의 수고에는 결과적으로 안식이 있습니다. 안식은 그냥 편안히 있다는 의미보다 기쁘다는 말입니다. 또한 ‘종신토록 수고를 하여야 그 소산으로 먹으리라’ 한 저주로 오는 이 수고에는 결과적으로 기쁨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타락 후인 고로 전부는 저주의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소원도 목적도 취미도 간구성도 전부는 세상을 위한 해 아래의 수고이니 그 마음에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해 아래의 수고는 임시성이기 때문에 영원한 대가성이 없습니다. 영혼의 쉼이 없습니다. 영혼을 위함이 아니고 전부는 육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수고는 해 위의 수고, 우리의 영을 위한 신령천국의 수고입니다. 이 수고에는 결과적으로 대가가 있고, 기쁨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왜 부르느냐? 쉼을 주고, 안식을 주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부를 때 왜 부르느냐? 영혼에 쉼을 위해서 부르느냐, 물질적 이해타산 때문에 부르느냐? 공장에서 사람을 부릅니다.(모집) 정치가가 사람을 부릅니다. 예술이 사람을 부릅니다. 사업가가 사람을 부릅니다. 종교계가 사람을 부릅니다. 세상에서 사람을 부를 때 멸시 천대받는 자들을 부릅니까, 물질 이해타산이 깔려 있기 때문에 실력 있는 자들을 부릅니까?
불신세상이 ‘어떻게 하면 안식을 누려볼까? 어떻게든 스트레스를 풀고 기쁨을 가져보자’ 하고 만들어낸 것이 놀이문화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래 부르고 춤추고 흔들고 하늘보고 손가락으로 쑤셔도 그것 역시 사람에게 영혼의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 자체가 수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는 목적을 바꾸지 않는 한 수고는 면할 길이 없습니다.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인간 자기가 영혼의 쉼을 받으려면 먼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시선을 주님께로 돌리고 주님께로 가야만이 죄짐이 부려지고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11장 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께로 돌아왔으면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께 무엇을 배우는 것이냐? 성경의 역사적 지식을 배우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배울 것이냐? 주님의 마음은 길과 진리와 생명과 성령의 감화로 되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면 주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온유의 일반적인 뜻은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고,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입니다. 인간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고 나온 온유와 겸손이지 길이요 진리요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온유와 겸손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의 온유와 겸손과는 그 근본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이 다르니 그 질도 다른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온유와 겸손을 앞세워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립을 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일반적 인인 관계적으로 나무랄데 없이 온유와 겸손의 도덕적인 사람인데 진리의 온유와 겸손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립성을 띠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은 진리와 아가페 사랑으로 된 신령한 존재들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성품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립성이 없는 절대적 자원적 순종입니다.
이 행동이 이방 세상 인간들 앞에는 교만하게 보일 때도 있고, 한없이 바보처럼 보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처럼 겸손한 사람이 없는데도 그 모세가 지팡이만 들었다 하면 무섭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한없이 나약하고 바보처럼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와 겸손성이 인간 자기 보기에는 이렇게도 나타나고, 저렇게도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온유와 겸손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과는 질적, 본질적, 본성적, 근본적으로 달라서 늘 대립성의 성질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도덕성의 기준을 가지고는 주님의 온전한 온유와 겸손으로 사람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반세상의 도덕성과, 주님의 도덕성을 분별치 못하고 일반세상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일반적 타락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멍에를 메어라’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보라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배워보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행위를 준수케 하는 굴레만 씌웠지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굴레를 씌우는 교회가 많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깨달음을 받아야 사람이 바로 놓여지지 깨닫지 못하면 사람이 바로 되지 못합니다.
사람 속에 늘 죄성 주관성 교만성 영웅성 허풍성만 가득 들어 있어서 사람의 마음에 평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누구를 배우고, 뭘 배워서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정치 문화 예술 상업 공업 이방종교? 무슨 도를 닦아서? 전부는 해 아래의 것이라서 마음에 평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전도를 해서 사람을 불러 놓고 인간창조의 목적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사람의 위치를 바른 제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면 인간이 온 천하를 다 가진다 해도 그 마음에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훈은 인간이 사는 것을 매우 재미있고 활기가 넘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성화구원이라는 보배를 발견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이치의 깨달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생활을 가르침이 아닙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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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인격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심원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애성에서 발로된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신앙을 해야만 됩니다. 이래야 기독교 본질에서 이탈하지 않고 가장 효율적 적중적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을 수 있고, 성도 각자가 이 땅에서 이렇게 덧입은 하나님의 성품의 양에 따라 장차 천국에서의 누림에 차등이 생기게 됨을 성경을 통해 알 수가 있습니다.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및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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