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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3: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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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7-03-21춘천 성암감리교회 |
21세기의 계시와 믿음의 숙제
계3:17-19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데오스’또는 ‘디오스’라고 합니다. 이는 본시 그리스의 신 제우스에서 나오는 말로 ‘최고의 신’이나 ‘우두머리 신’을 부를 때 쓰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유일신을 믿지만 고대 그리스나 고대인들은 여러 명의 신이 협력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여러 신들 중에 제일 강력한 우두머리 신이 제우스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장사(산업)의 신 헤르메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중재의 신 크레뮐로스, 부자의 신 즉 돈의 신인 폴루토스가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들은 이쯤이기 때문에 이들만 소개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라는 이가 그의 외동아들을 위해 신전으로 빌러 갔습니다. 이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비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내 외동아들이 이제 인생을 살 때 못할 짓이 없이 교활하며, 불의에 능하고,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세요.’였습니다. 이게 인생의 성공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외동아들이 아버지가 신에게 기도하자 그걸 들은 크레뮐로스라는 중재자의 신이 그를 데리고 어느 집을 찾아갔는데 그가 바로 ‘돈의 신’ ‘부자가 되게 해주는 신’ 플루토스신이었습니다.
자, 여러분 생각에 이 부자의 신, 돈의 신의 풍채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 어떤 신보다 기름진 모습과 여유와 행복이 철철 넘쳐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들을 위한 기도에 응답을 받고 아버지가 초대받아 간 ‘돈의 신’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제우스가 이렇게 만들었네. 소싯적 나는 정직하고 현명하고 점잖고 욕심 없이 나누는 사람에게만 방문하도록 되어 있었네. 헌데 제우스가 나를 장님으로 만들었어. 내가 그런 사람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말야.” 본래 돈의 신인 플루토스는 정직, 성실, 근면, 정의의 수호자였습니다. 그런데 제우스가 그의 눈을 멀게 하여 그런 사람을 찾아가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이 폴루토스라는 돈의 신은 돈이 찾아가야하는 그런 사람과는 정반대인 시기와, 기만과, 협잡과 욕심의 공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본래 돈의 신은 열심히 노략하고, 힘써 나눠서 정의를 이루려는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신이었습니다. 그게 폴루토스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면 제우스는 왜 돈의 신의 눈을 멀게 하여 거짓과 술수의 협잡꾼들이 부자가 되게 한 걸까요? 이건 이렇습니다. 만약 제우스가 있고 플루토스가 있어서 제우스가 우두머리고 플루토스는 눈이 밝아 부자가 될 만한 사람들에게 부자가 되게 했다면, 사람들은 제우스와 플루토스 두 신 중에 누구를 더 찾고 사랑했을까요? 제우스보다 플루토스를 더 사람들이 우러르고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제우스는 플루토스에게 돈을 늘리는 재주만 주고 돈을 나눠주는 능력은 거둬서 자신이 차지했던 것입니다. 이게 부자의 신 ‘플루토스가 장님이 된 이유입니다.
이런 자초지종을 크레밀로스가 듣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부탁하여 장님에서 눈을 뜨게 해주겠다고 말입니다. 크레뮐로스의 부탁을 받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부자의 신, 돈의 신이지만 장님이 된 플루토스의 눈을 뜨게 해줍니다. 플루토스가 눈을 뜬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은 이겁니다. “내 친구들인 농부들을 불러줘. 그들은 아마 들판에서 일만하고 있을 거야. 그들더러 이리 와서 플루토스가 농부들을 위해 마련한 선물들 가운데 각자 자기 몫을 받아 가지고 가라고 해줘.”
자, 이제 여러분에게 여쭤보겠습니다. 부자의 신, 돈의 신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의 본성 즉, 공정한 나눔, 성실, 근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기 시작한 거죠. 이러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완전히 뒤집어 집니다. 혼돈과 분노가 난무했습니다. 세상이,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중에 가장 분노한 신은 상업의 신 헤르메스였습니다. 여하튼 프루토스가 눈을 뜨자 세상이 변했습니다.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돌아가는’ 그런 세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이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인간성의 혼란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부자의 신이 눈이 멀어서 부자가 될 만한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는 까닭입니다. 이것이 정의, 분배, 자유, 공평, 인간 존중과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그 스스로 눈이 멀어서 눈먼 돈의 신 플루토스를 추종했습니다. 그게 옳은 가치관인 줄 알았습니다. 아닌 줄 알면서도 은근슬쩍 장님의 대열에 편승해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지금 힘 있는 장님과 힘없는 장님만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눈이 감긴 돈의 신 플루토스는 힘 있는 장님들과만 짝을 이뤄 세상을 움직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격변과 혼란도 바로 그것입니다. 눈 감았던 플루토스가 눈을 뜨고 있습니다. 플루토스가 제 눈을 뜨면 온갖 격변이 일어납니다. 인간들의 이성과 경험과 관성은 과거처럼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전에 가치는 현재의 가치가 되지 못합니다. 이런 변화는 프랑스혁명이나 미국의 독립과 같은 일들이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이 시대가 겪는 이 혼란과 변화는 바로 그 혁명의 징조입니다. 플루토스가 눈을 뜨는 게 곧 혁명이요 혼란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장님 플루토스를 붙들고 살던 사람과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플루토스와 같이 눈을 떠야 하는 겁니다.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세상과 세상의 일, 인간 개개인의 가치관, 삶의 방향성과 삶의 목적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요한이 왜 밧모섬에서 이런 계시를 받아서 일곱 교회에 전달하는 걸까요? 눈을 뜨고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이 아닙니까? 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다가서는 세상에 살 수 있는 품격을 갖추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변화와 혁명의 요구가 아니라면 뭐하러 계시를 받았겠으며, 그 계시를 뭐하라 교회에 전달을 하겠어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시야, 사고, 가치관, 삶의 내용을 요한이 받아서 대중에게 전달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눈에 안약도 바르라는 거고, 허접한 생각이나 삶의 태도를 버리고 믿음만을 단단히 붙잡으라는 거고, 연단을 받아야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다음에야 새 세상에서 정금같이 빛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어떤 ‘계시’를 받을까요? 오늘 말씀드린 바가 바로 ‘이 시대의 계시, 현실의 계시’이고 그걸 여러분에게 전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지각변동과 가치변화의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하던 눈 감았던 플루토스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 되니까 그동안 돈만 있으면 최고의 선이고, 덕이고, 축복이고, 행복이라던 사람들이, 그걸 위해 온갖 사기와 속임수, 거짓말과 탐욕, 배신과 모반을 일삼던 이들이 당황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이 혼란스러운 거예요. 그러니 눈에 보이는 단편에 흔들리지 말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눈을 뜨는데, 그동안 욕망의 제우스에 이용당하던 부자의 신 플루토스도 눈을 뜨는데 사람들이 눈 감고 살면 되겠어요? 눈을 떠서 진정한 부자의 신이 구현하려는 세계 정의, 평등, 행복, 분배와 사랑의 세계를 이뤄야 합니다. 이게 요한의 시대에 요한의 숙제가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계시록을 통해 새 세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지금 이 시대 우리 신앙의존재론적인 과업이 뭔지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각자의 몫이 각자에게 돌아가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걸 향해 그동안 눈 감겼던 부자의 신 플루토스가 눈을 뜨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눈을 뜨고 새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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