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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으로 더욱 뜨거워지다

마가복음 양창천 목사............... 조회 수 497 추천 수 0 2017.05.30 23: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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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1-11 
설교자 : 안창천 목사 
참고 : d3왕의사역 평신도제자훈련원 http://d3.or.kr 

사명으로 더욱 뜨거워지다

막1:1-11

2015.1.4


오늘이 새해 첫 주이기 때문에 연말에 미리 새해 첫 주에 할 설교를 구상해 놓았습니다. 제가 새해 첫 주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모세가 죽은 후,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대로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2015년 새해를 맞이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도 말씀대로 살아가자는 취지의 말씀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읽은 본문으로 바뀌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목요일 새벽에 한 큐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매일성경’으로 큐티를 하고 있는데, 새해 첫 날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동신교회에서 시무할 때에 이 본문을 가지고 새벽설교를 한 것이 생각나서 그 때에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세 번에 거쳐 말씀을 전했는데, 오늘 전하는 내용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성령께서 본문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하셨습니다. 새롭게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드리기 전, 먼저 마가복음이 왜 쓰여졌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즉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쓰여 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마가가 가장 먼저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박해를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말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박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복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벌벌 떨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다른 문제도 복음을 믿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에 봉착했어도 복음을 정말 믿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는데 복음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교회는 지금 최고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제 교회에서 저녁기도회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10시 50분이었습니다. 무슨 방송인지는 모르지만 낯익은 곱슬머리를 한 사람이 ‘오늘 미래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강의의 내용이 제 귀에 솔깃했던 것은 제 귀에 생소한 단어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메타언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많은 데이터에서 관심이 있는 내용을 스크랩한 정보를 블로그에 정리하는데 이때에 각각의 정보들을 아우르는 한 단어가 필요한 데 그것을 ‘메타언어’라고 부르며, ‘메타언어’를 만들어내야 100세 시대를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알아보니 문화심리학자 김정운교수라는 명지대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에 관해 좀 더 검색해보다가 그에 관해 누군가가 부정적인 댓글을 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교회, 부자간에 세습한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허세적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댓글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의 지탄이 되고 있는 개독교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교회의 현실이 암울해도 우리가 복음을 정말 믿으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사도, 직장사도 모두 복음을 믿으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먼저 복음을 소개한 후, 먼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소개합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막 1:2-3). 이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 그분의 오시는 길을 미리 준비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말하면서 동시에 세례요한이 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명령에 순종한 자가 바로 ‘세례요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례요한을 생각하면 주로 무엇이 떠오릅니까?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자’, ‘예수님께 세례를 준 자’, ‘헤롯왕에게 목 베임을 당한 자’ 등이 떠오를 것입니다. 저 역시 지금까지는 세례요한을 생각하면 우선적으로 그런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큐티를 하면서 세례요한에 대해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주님께서 오실 길을 예비할 자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 예언의 성취에 쓰임 받은 자가 바로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즉 세례요한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인물가운데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쓰임 받은 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지는 순간, 번뜻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나는 지금 누구의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마귀의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가?” 그 답은 전자였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주님의 지상명령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위해서입니다. 즉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더처치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제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자 자신도 모르게 기쁨이 솟구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이런 기쁨과 감격을 가져야 합니다. 이 기쁨과 감격으로 새해를 시작한다면 어떤 일을 당해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방향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방황을 합니까? 왜 우울증에 걸리고 자살을 시도합니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모르고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추구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자이고 그 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방황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환난과 핍박과 기근과 위험과 적신이 그를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기뻐하며 감사하며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한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 그가 싸운 싸움이 무엇입니까? 그를 대적하고 미워하는 사람들과 싸운 싸움입니까? 아닙니다. 사명을 가로막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하는데 그가 달려간 길이 무엇입니까? 사명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탁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달렸기 때문에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일 교회에 출근해서 큐티를 마치고 송구영신예배 때에 드린 헌금을 정리하면서 겉 봉투에 적힌 글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성도들 모두가 한결 같이 사용한 기도제목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새해 소원을 들여다보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처치 식구들은 그런 기도제목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특히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가정되게 하소서.” 왜 이 글귀가 저의 가슴을 더욱 더 감동시켰는지 아십니까? 목요일 아침, 큐티한 내용과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 계획하신 일에 온전히 쓰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온전히 쓰임을 받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에 온전히 쓰임을 받기 위해 힘든 길을 선택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사명이 뜨거워지고 강해져서 금년에도 그 길을 더욱 힘차게 달려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요한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드러내놓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가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 영적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편하고 먹고 살았지만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광야에서 외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을 가졌기에 편한 것을 좋아하고,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이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살면 결코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최민수씨가 MBC 연기대상 황금연기상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연기대상은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상은 연기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민수씨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돌출행동에 찬반여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혹자는 “연예인이면 연기를 해야지 왜 정치를 하느냐?”고 비난하고, 혹자는 “최민수씨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는 진짜 남자다.” 그런데 제가 최민수씨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의 행동을 칭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용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꺼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이지 세상에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과 구분이 되지 않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육체의 삶을 즐기고 있었을 때에 고독하게 비난을 들어가며 방주를 짓는 일에 관심을 쏟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7절을 읽어보십시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자신과 예수님과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볼 때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당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우리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오늘날도 기독교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은 친족 간으로서 그들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사촌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요한은 혈육 상으로는 예수님의 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세례요한은 유대 사회에서 영적인 지도자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자 온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였고 귀족들까지 두려워할만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을 지극히 낮추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 당시 신발끈을 푸는 것은 종들이 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종이 하는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낮춘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겸손이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사용하실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는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을 받고 싶으면 자꾸 자신을 낮추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11:29). 예수께서 자신을 왜 겸손하다고 하셨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왕궁에서 태어나셔야 하지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죄인이 아니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어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겸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토록 크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故 옥한흠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를 되돌아보며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는 것을 절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을 부족하다고,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잘 난 것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사탄의 공격의 표적이 되어 참패를 당합니다.


우리가 작아지고 약해질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우리가 뭔가 자신을 내세울 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빼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전능자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언제 사용하셨는지 아십니까? 그가 젊었던 30-40대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경험이 풍부한 50-60대도 아닙니다. 아무런 힘이 없었던 80세에 그를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실까요? 자신의 힘으로 하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저를 왜 이제야 쓰시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60이 다 되어가고 건강하나 자신했는데 그 건강마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위해서는 더욱 더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돈, 외모, 학벌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이 보는 겸손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겸손은 전혀 다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 앞에서 낮추면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자를 겸손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자를 겸손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족한 자인 것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더욱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세례요한이 사명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자신을 낮추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입니까?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막 1:9). 방금 전에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께서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신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자 세례요한이 말리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왜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세례는 죄인이 받는 것인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라고 하시자, 요한은 할 수 없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머리에 손을 언고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영광을 얻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디로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나님께서 온전히 쓰임을 받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을 받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세례요한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아십니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마 11:11)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자신을 낮추는 자들에게 이런 영광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은 주께서 주신 사명에 온전히 순종하였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상을 주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더처치는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지상명령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집중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동일한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2015년, 더욱 더 이 사명을 불태워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살고 더욱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는 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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