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 중 일곱째 재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재앙을 내리실 때 우박과 함께 우렛소리와 불도 내리셨지만 일반적으로 일곱째 재앙을 ‘우박재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일곱 번째 재앙을 애굽에 내리신 것은 여섯 번이나 계속해서 재앙을 내리셨어도 바로가 계속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박재앙을 내리시기 전,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서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내보내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일곱째 앙을 내리시기 전에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섯째 재앙을 내리기까지 계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출 3:10;5:1;9:1).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단지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있지 않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노아홍수 심판을 보십시오. 홍수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모든 생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중에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고 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불로 이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 중에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저부터도 고난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 같이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을 세 사람만 들라고 하면 욥, 요셉,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고난 당한 것이 큰 축복이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다듬으시고 연단하시고 마침내 복을 주십니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만 보고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의 배후에는 우리를 살리시려는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알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혹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셔도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큰 어려움을 당하면서 이런 사실을 새삼스럽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너무 힘들고 어렵지만 제 영혼이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있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더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잠자던 기도가 살아났고 큰 소망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박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왜 바로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했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16-17절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라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먼저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본문에서 ‘내’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너’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너’를 모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너’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바로를 세우신 것은 그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여 좋은 의미로 이해하고 자신에게도 이 말씀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제가 신대원을 다닐 때였습니다. 외출을 하려고 기숙사 복도를 걸어가는데 어느 원우생 출입문에 적혀 있는 출애굽기 9장 16절 말씀이 눈에 뜨였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와 본문을 자세히 읽던 중 본문에서 ‘너’는 모세가 아니라 바로라는 것을 알고 허탈감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작년 6월,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국민일보 1면 하단에 사랑의교회 광고가 실렸습니다. 우측 전면에는 기도하는 손과 공을 차는 남성의 그림이, 좌측 상단에는 “2014 브라질 월드컵 한국교회가 응원합니다”가, 좌측 중간에는 “온 국민의 소망을 담아 한국교회가 태극 전사를 응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있었고, 그 밑에 오늘 읽은 성경 구절이 쓰여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애굽기 9:16). 한 마디로 한국축구팀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온 천하에 하나님의 이름이 전파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바로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교만하여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성경은 바로가 이스라엘백성을 보내지 않은 이유를 그가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교만하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까요? 그것은 교만하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뜻과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지시를 받기를 싫어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잘못에 대해 충고를 받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매우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만’과 관련하여 보다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바로가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교만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교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교만의 정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성공의 적, 교만’에서 교만의 정체를 마귀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교만을 정의한 것은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부추길 때에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된다”고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처럼 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생각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마귀가 이렇게 거짓으로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난을 당해도 자신의 고집과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너무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죽이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죽으면 마귀가 공격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살아있는 자를 공격하지 죽은 자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혈기도 내지 않고, 정욕도 없어지고, 자기 생각도 없어지기 때문에 마귀가 공격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아를 죽일 때에 마귀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음으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이 죽는 게 어디 쉽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것처럼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수요일 혈액검사 결과를 알기 위해 예약한 시간에 병원에 갔습니다. 대기 시간이 꽤 될 것 같아 책 한 권을 가지고 갔습니다. 약 30분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던 중, 저의 마음을 움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평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생각으로 신촌에서 걸어서 교회까지 왔다가 곧바로 절두산 성지로 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절두산 성지에는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을 14처로 나눈 ‘십자가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 것을 다짐하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합정역 주변의 집 시세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부동산중개소로 들려서 원하는 물건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즉시 대답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계속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그냥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생각하자 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잠시나마 저를 죽이는데 성공하자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마귀의 공격을 받아 패배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마귀는 우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자신을 죽임으로 그동안 집요하게 공격했던 마귀가 떠나고 겸손함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박재앙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시자 애굽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0-21절을 읽겠습니다. “바로의 신하 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의 종들과 가축을 들에 그대로 두었더라.” 하나님의 재앙경고를 듣고 애굽의 신하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들과 가축들을 집으로 들였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그대로 두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몇 차례 재앙을 겪으면서 애굽 사람들 중에 모세와 아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인내해야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약속대로 되어 집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10-11)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따라서 말씀사역의 열매를 맺기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중국에는 모죽이라는 대나무가 있는데 성장속도가 아주 독특해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심은 지 5년이 지나도록 3센티에 불과한 새싹만 보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라나기 시작하여 약 세달 동안에 25미터나 넘는 크기로 자랍니다. 일본에서는 하루에 1미터 20센티나 자란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땅속으로 뿌리가 깊숙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종종 이렇게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말씀사역을 할 때는 조급하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혹 말씀에 은혜를 받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안 되고 있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말씀대로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지만 열매가 없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내하고 전하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시듯이 우리도 자신과 상대방을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매주일 김태규 성도님을 보면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동신교회에 있을 때만 해도 예배시간에 말씀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맨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인내로 풍성한 말씀의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자 우박재앙을 내리셨습니다. 22-26절을 보면 우박재앙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전국에 우렛소리와 불과 함께 우박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애굽 개국 이래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재앙이었습니다. 그 재앙은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쳤고 들의 모든 나무를 꺾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절). 같은 나라에 있었지만 애굽 백성에게는 우박재앙을 내리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고난을 겪게 되지만, 결코 하나님의 심판이나 재앙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앙과 관련해서 우리가 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재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까? 유대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결국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습니다. 그들이 당한 형벌은 그 어느 민족이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했습니다. 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갔을 때에 가이드에게 들은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유대인을 그대로 태우면 몸의 수분 때문에 빨리 태울 수 없어서 세탁기에 넣어 돌려서 수분을 뺀 후에 태웠다고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의 자리에 머물므로 재앙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박재앙으로 애굽 전역이 피해를 당하자 바로가 어떻게 합니까? 모세를 찾아가서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되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합니까? 바로의 말이 거짓인 줄 알고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대로 우렛소리와 우박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먼저,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떻게 모세가 바로의 말이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우박재앙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을 어떤 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내는 일을 하는 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자신을 중보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중보자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단지 연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중보자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바로의 말이 거짓인 줄 알았어도 자신이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에 대하여 함부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그를 위해 중보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도 자신을 중보자로 이해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그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을 모세에게 배워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기도가 거짓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심판하시지 않고 그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고 아무리 악한 자라도 회개하기를 원하고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삶을 살아도 하나님께서 종종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에 관심을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속히 주님께 돌아오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께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