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룻기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의 끝을 어떻게 맺고 있습니까?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1-22). 본문은 다윗의 아버지가 이새이고, 이새의 아버지가 오벳이고, 오벳의 아버지가 보아스이고,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룻기의 저자가 이렇게 족보를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룻의 아들인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이고 결국 혈통 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룻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지만 ‘오벳’은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오벳은 예수께서 그의 후손으로 오실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벳’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 아십니까? 본문 1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일반적으로 자녀의 이름은 부모가 지어줍니다. 그런데 ‘오벳’의 이름은 그의 부모가 지어주지 않고 이웃여인들이 지어주었습니다. 왜 동네여인들이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고 지었을까요? ‘오벳’은 ‘섬기는 자’라는 뜻인데 그가 이름대로 나오미의 생명을 회복시키고 그녀의 노년기에 봉양자가 될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룻 4:15).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벳’은 단지 나오미를 섬기는 삶만 살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벳’은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한 마디로 ‘오벳’은 축복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오벳’이 축복의 대명사가 된 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오벳이 탄생하는 과정에는 여러 사람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수고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이 시대에 또 다른 ‘오벳’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나오미의 ‘회개’가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살던 시대는 사사들이 통치하던 때라 정치적으로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유다 땅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째 아들 말론은 이방 여인 룻을, 둘째 아들 기룐은 오르바를 각각 아내로 맞게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마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 마디로 나오미는 연속적으로 환난을 당했습니다. 왜 나오미에게 계속해서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룻기 1장 13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음으로”(룻 1:13). 다음은 룻기 1장 19-20절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19-20).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미의 고백을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계속 당한 고통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고 자신에게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닥치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고통을 당할 때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후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입니다. 혹 문제가 있습니까?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깨닫고 회개한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나오미는 누구의 것을 훔치거나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기근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모압 땅으로 가면 기근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곳으로 이사한 것밖에 없었습니다. 즉 문제를 만났을 때에 주님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것 밖에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것을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한 것으로 깨닫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미를 보면서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현행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야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한복음 16장 8-9절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그렇습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죄에서는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만을 죄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4장 17절은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3장 4절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거나,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거나, 법을 어기는 것 역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날마다 그분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 중에 죄와 무관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계속해서 짓는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땅에 버려져 발에 밟혀 버려진 소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물로 씻듯이 예수의 피로 날마다 죄를 씻어야 합니다. 날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진짜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고난을 떠올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혹독한 고난을 받은 자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열 자녀를 잃었습니다. 자식 하나만 잃어도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픈데 열 자식이나 잃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또 그는 양 칠천 마리와 낙타 삼천 마리, 소 오백 겨리와 암나귀 오백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가 잃은 가축을 오늘날의 시세로 환산하면 100억 원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모두 잃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또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었습니다. 우리 몸에 한 군데만 아파도 고통스러운데 몸 전체에 악창이 나서 긁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더군다나 성경은 그를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가 고난을 당할 때에 자신보다 의롭게 살지 못하는 자들이 찾아와서 “네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욥이 그토록 무서운 고통가운데서 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이었습니다. 욥기 42장 5-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그렇습니다. 욥은 고통의 때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욥에게는 가장 큰 복이었습니다.
참된 복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준비하신 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기적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혹 여러분이 이런 저런 일로 고통 속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데서 그 원인을 찾지 말고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잘못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룻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두 자부 중 오르바는 모압 땅에 남았지만 룻은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룻은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에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봉양하기 위해 보리 줍는 곳에 가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실하게 이삭을 줍자 그 소문이 퍼져서 밭의 주인인 보아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나오미의 자부인지를 알고서는 소년들로 하여금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식사도 함께 하는 등 특별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룻이 집으로 돌아와서 보아스가 자신에게 잘해 준 이야기를 시어머니에게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으로 기업을 무를 사람이니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그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그의 곁에 누우라.” 이 말은 보아스에게 청혼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룻은 시어머니의 말대로 단장을 하고 보아스의 곁에 누웠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가까워져서 보아스로부터 자신의 기업을 무를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내었고, 급기야는 결혼하여 오벳을 낳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룻이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룻이 시어머니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 시어머니가 시킨다고 다른 남자의 잠자리에 눕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오늘날처럼 개방적인 시대에도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누군가에게 먼저 청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시에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룻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룻기 1장 15-17절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룻은 엘리멜렉과 결혼하여 개종하였고 시어머니가 믿고 따르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시어머니의 말에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종과 믿음은 동전의 앞뒤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순종하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룻이 믿음을 가지고 시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가 보아스와 결혼해서 오벳을 낳았고 메시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순종이 없이는 진정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신과 기독교 신앙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미신은 삶과 상관없이 빌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고, 기독교 신앙은 말씀에 순종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복을 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망한 것 같지만 가장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직하게 살면 망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직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최고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위에 덤으로 받는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이 세상과 천국에서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후 25년간이나 약속을 기다려서 100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떼래야 뗄 수 없습니다. 더처치 성도들은 늘 믿음이 충만하여 온전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보아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영영히 팔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레 25:23). 그러나 만일 가난해서 토지를 팔았을 경우 나중에 ‘근족’, 즉 가까운 친척이나 본인이 다시 무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기업 무르기’라고 합니다. 당시 나오미 가정은 땅을 팔고 모압으로 갔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친족이 무르기를 하면 다시 기업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부를 보아스에게 가까이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입장에서 보면 룻의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으면 기업을 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보다 가까운 친척이 기업 무르기를 하려다가 손해를 볼 것 같자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희생을 각오하고 나오미 가정을 위해 기업 무르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과 동침하여 오벳을 낳았고 그를 낳아 메시아의 족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이 없는 곳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게 된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기심을 버리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기심을 버리지 않으면 다툼과 분쟁이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욕심을 부려야 풍성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희생할 때에 상상을 초월하는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삶속에서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벳새다 광야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한 아이가 자신이 먹으려고 준비해온 도시락 전부를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린 아이가 자신만 생각하고 오병이어를 내어놓지 않았다면 5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강재구 소령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명문인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제16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하루는 월남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을 훈련하고 있었는데, 박 모 이등병이 안전핀을 뽑고 던지기 위해 그만 뒤로 재끼다가 수류탄을 놓치게 되어 대기 중인 중대원 가운데로 떨어져서 많은 부대원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강재구 소령이 몸을 날려 폭발하려는 수류탄 위에 덮쳐 중대원 1백여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다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강재구 소령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않는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산화하던 날 새벽, 그가 읽었던 성경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그 구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복음 15장 13절이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는 이 말씀대로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수많은 장병을 살리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벳의 탄생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그러나 오벳의 탄생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회개와 룻의 순종과 보아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순종과 희생이 함께한 곳에 축복과 기적의 꽃이 활짝 피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고 희생하면 또 다른 ‘오벳’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회개와 순종과 희생을 통하여 수많은 오벳이 만들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