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일본의 히로시마에 가면 ‘히로시마 평화공원’이 있습니다. 들어가 보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는 한 장의 전단지가 있습니다. 이 전단지는 1945년 5월부터 대량으로 살포되었던 전단지인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경고한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까지 시내로부터 50km 밖으로 대피하라. U.S. Air Force” 그런데 히로시마 시민들은 이 전단지를 받아들고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미 공군의 경고를 듣고 히로시마 시내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전단지를 미군의 심리전의 일종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택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미 공군의 경고대로 히로시마 시내를 떠난 소수의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미군의 경고를 우습게 생각하고 시내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냉혹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원자폭탄이 터지면 상공의 온도는 섭씨 10만도를 넘고, 지표면의 온도는 섭씨 3천~4천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자폭탄 투하로 사망한 자 9만여 명중 3분의 2 정도는 불에 녹아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피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폭 2세 4,080명 가운데 이미 수백 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절반을 넘는 사람이 10살 전에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자들도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또래의 일반인들에 비해 질병 발생 빈도가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북한의 핵실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혹 북한이 핵폭탄을 사용할 경우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로시마 시민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원폭 피해를 입은 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 아니라 히로시마 시민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이 전단지 한 장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장의 경고에 대한 반응이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미군의 경고를 듣고 살던 곳으로부터 50Km만 떠났다면 그토록 혹독한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 것은 전적으로 미군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내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히로시마 원폭사건을 통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경고’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고에는 크게 두 가지 가 있습니다. 단지 겁을 주기 위한 경고가 있고 실행하기 전 미리 알려주는 경고가 있습니다. 전자의 경고는 무시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고는 절대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경고를 무시하면 경고한 대로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후자의 경고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모두 만들어놓으시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르시기를 ‘아담아, 네 마음대로 이 세상을 다스려도 된다. 그런데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큼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개역판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엄중하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렇게 준엄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저주를 받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이 저주가운데 살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경고입니다.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경고가 있습니다.
첫째로, 반드시 사람은 한번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인류를 향하여 공통적으로 던졌던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첫째로, 인생은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로, 인생은 왜 살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생은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 질문 즉, 인생이 어디로부터 왔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각각 다릅니다.
첫째로, 인생은 어디로부터 왔느냐는 질문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답을 합니다. 창조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원숭이로부터 진화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두 번째 질문도 전혀 답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비신자들은 각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질문 즉, 인류는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동일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국부와 같았던 다윗왕도 죽음을 앞두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유언했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왕상 2:2). 무슨 말입니까? 죽음이란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여자든 남자든, 돈이 많든 적든, 잘 났든 못났든, 악하든 착하든,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다 한번은 죽어야 합니다.
왜 죽고 싶지 않은데 모든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늙고 병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람이 늙고 병들어서 죽는다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늙지 않은 사람이 죽는 것을 수 없이 보고 있습니다. 건강하던 자가 하루아침에 죽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몇 년 전, 세계적인 팝 황제인 마이클 잭슨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의도침례교회에서 강릉 경포대에 여름수양회를 갔다가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전도유망한 청년이 바다로 들어가더니 죽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제 친구는 한탄강 유원지로 놀러가서 강으로 들어가더니 죽었습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밤중에 시체로 발견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밤새 안녕’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사람이 늙거나 병이 들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은 모두 죽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죽는 것은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한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히 살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위해서 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놓고 가야만 하는 매우 미약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유한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에노스’가 세상에 탄생한 후부터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에노스’의 뜻이 ‘연약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함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문제가운데 있지만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무능하고 미약한 자들입니다. 오늘이라도 주님께서 부르시면 다 손을 놓고 가야 합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는 잠시 살 수 있어도 하나님은 떠난 인간은 잠시 동안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 15:5)고 말씀하셨고, 그토록 능력 있게 사역했던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의 경고를 들으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미약한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둘째로, “죽은 후 심판을 받는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금생의 죽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은 후에는 지옥에 던져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아십니까? 사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후에 들어가는 곳이므로 지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본문을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49절입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고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으로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한 번은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지옥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을 믿으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누군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6)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실을 믿을 때에 죄 사함 받고 심판을 받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빚을 갚을 수 없었는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채무를 변제해주므로 더 이상 빚을 갚을 필요가 없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태규 성도님이 누군가에 빚을 졌는데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빌 게이츠가 찾아와서 “김태규씨!, 당신이 진 빚을 모두 제가 갚아드리겠소”라고 하면서 빚을 다 갚아주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태규씨가 그 빚을 갚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 값을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완전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혹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죽을 수 있습니다.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야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평생 주님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혹 지금까지 왜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를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바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실을 믿는 순간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거의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천국의 상을 바라보고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고 지옥 불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그날에 상급을 위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최고의 상을 받기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 성경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지만 천국의 상은 행한 대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부끄러운 자가 있을 것이고, 영원히 왕 노릇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 롯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자 그는 사위들에게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이러나 이곳에서 떠나라”(창 19:14)라고 경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위들이 그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불과 유황의 세례를 받고 무참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 한번은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와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두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경고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지막 심판을 두려워하는 자세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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