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기도하실 때 무슨 기도를 하셨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는 문자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기도하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기도에 과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사명인 전도를 위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누가는 왜 다른 복음서기자보다 예수께서 기도하신 사실을 많이 기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는 특별히 예수께서 사람이심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명을 위해 기도할 때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로, 하늘이 열립니다. 열린 것은 닫힌 것을 전제합니다. 커튼이 열리면 새로운 장면이 연출되듯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십니다. 둘째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십니다. 예수께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처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노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이 음성을 듣고 끝까지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듯이,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의 음성을 듣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3절을 읽어보십시오.“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예수께서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공생애동안 3가지 사역을 하셨습니다. 즉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3가지 사역을 다 말하지 않고 가르치신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가는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가운데서 가르치는 사역을 예수님의 대표적인 사역으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랍비, 즉 선생으로 불리실 정도로 가르치는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기회만 나면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사역이 없이는 제자를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를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후대까지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제자를 만들지 않으면 세계복음화가 빠르게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의 후손들은 복음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승천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제자를 삼을 때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후대까지 전승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유를 불문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르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나라 없이 수천 년을 방황했지만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을 통하여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라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르침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르침이 반복되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제자훈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또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가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을 보면‘30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30세가 되어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범사에 때가 있기 때문에 기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정하고 일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범사에 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고 말하지만 기도의 응답도 때가 있습니다. 범사에 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그 때가 차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께서는 사역을 하시기 전, 30년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준비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큰 일 일수록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사역을 위해서는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합니다. 준비하는 기간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제자들을 그냥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내시기 전, 가르치셨고 자신이 하는 사역을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셨습니다. 왜 제가 여러분에게 자꾸 훈련을 받으라고 할까요? 그것은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신만큼만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사역의 터를 굳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3년의 공생애를 위해 30년을 준비하셨습니다. 준비하는 시간이 길수록 사역을 그만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내게 8시간 나무를 베어야 한다면 6시간을 톱은 가는데 사용할 것이다.”8시간 일을 위해 6시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무를 베는데 14시간 걸립니다. 그런데 만일 톱을 갈지 않고 나무를 벤다면 얼마나 걸릴까요? 14시간 보다 훨씬 더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톱이 잘 들지 않아 고생을 엄청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얼마나 빨리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이 일하실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셋째로,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마태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16절을 보시면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즉, 하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3장 23-38절을 보면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즉, 상향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정 반대의 방향으로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서를 받는 수신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하향식으로 기록한 것이고, 누가는 이방인들을 향해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담과 하나님까지 이르는 족보를 기록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엿볼 수 있습니까? 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중을 좀 더 알아야 합니다. 마치 부모가 가족들에게 보다 더 건강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하듯이, 어떻게 하면 비신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일방적인 말씀 선포로는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진짜주인이야기’, ‘진짜친구이야기’, ‘명품인생이야기’, ‘진짜아버지이야기’, ‘콩 심은 데서 팥을 거두는 이야기’ 등과 같은 전도소책자를 출간한 것도 바로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된 것이고, ‘D3왕의사역’의 훈련교재 역시 그런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넷째로, 누가는 예수님을‘요셉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 1장에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왜 마태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을 낳지 않았다고 말하고 누가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먼저 마태가 요셉이 예수님을 낳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죄 없는 인간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요셉이 낳았다고 한다면 요셉의 씨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누가는 요셉이 예수님을 낳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을‘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십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이 이렇게 예수께서 철저히 인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도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헬라철학의 사상적 기조는 이원론입니다. 즉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반드시 주장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는 믿지만 사람으로는 믿지 않으면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임을 믿어야 합니다.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시지만 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친히 2,000년 전 유대 땅에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분으로 탄생하셔서 공생애를 사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섯째로, 누가는 아담 그 이상을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 사람 아담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헬라어로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이는 위로라는 뜻의‘아나’와 ‘얼굴’이라는‘프로소폰’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얼굴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 아니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주인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인의 뜻대로 살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성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즘 순교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주로 적색순교를 다룬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백색순교를 다루는 책들이 나오고 함께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백색순교와 적색순교가 함께 이루어져야 온전한 순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순교의 영성으로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목숨을 바치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순교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렇게 사셨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 한 마디로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 안 됩니다. 마지막 날이 있음을 알고 주인의 뜻대로 살고 죽음으로 잘했다고 칭찬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듯이, 우리도 가르침으로 제자 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30세가 돼서야 사역을 하셨듯이, 우리는 범사에 때가 있음을 알고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인내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의 주인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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