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 밤이 맟도록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어디서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하신 장소를 ‘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왜 예수께서 기도를 집이나 성전에서 하시지 않고 산에서 하셨을까요? 그곳이 방해를 받지 않고 주님과 깊이 교제하시기에 가장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할 수 있고, 길에서도 할 수 있고, 차 안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해외를 다녀올 때마다 몇 시간 씩 비행기 안에서 기도합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우리도 산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일 주변에 산이 없거나 입산금지를 했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가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변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적합하다면 바로 그곳이 기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교회나 기도원에 가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산에서 ‘어떻게’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원문에 ‘미완료 능동태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지속을 강조하는 의학적 용어로써 밤을 새워 병을 간호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환자를 간호하는 사람이 한 시라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병하듯이, 예수께서 밤새도록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그분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지속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도를 1시간을 넘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잠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가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더냐”(마 26:41)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뭔가를 얻기 원한다면 오랜 시간을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도의 응답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야곱이나 엘리야를 손꼽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야곱은 환도 뼈가 위골될 때까지 밤새도록 기도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오랜 시간 기도하셨던 것 같이, 우리도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무엇때문에’ 산에서 오랫동안 기도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왜 예수께서 산에 오르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12사도를 택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 12사도를 택하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장차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야 할 사람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 일의 중요성을 아시고 밤새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서는 더욱 더 많은 시간을 주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사업을 결정하든지, 배우자를 결정하든지, 기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 전, 주님께 나아가 엎드려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크고 중요한 것일수록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을 선택할 경우 그로 인한 손실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한 동안 기도원 사역으로 한국교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사람 중에 최자실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는 조용기 목사의 장모이기도 한데, 믿는 자였지만 결혼할 때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세상적으로 조건이 좋은 비신자와 결혼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잘 살고 행복해야 하는데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대사를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결정하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큰 문제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 열둘을 택하시고 그들을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훈련하신 12명을 ‘제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들을 ‘사도’라고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는 제자와 사도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누가는 예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사도’라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사도’가 가지고 있는 뜻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12사람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12명을 뽑아서 훈련하신 것은 그들을 곁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께서 12사람을 뽑아서 그들을 ‘사도’라고 칭하시고 세상에 보내셨듯이, 우리도 제자훈련을 받고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만 머물지 말고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교회는 크게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만 머물고 있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듯이, 교회는 사람들을 훈련하여 세상으로 보내서 복음을 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예배당 안에서만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도 열심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가 세속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고 무기력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주기는커녕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지막으로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는 영혼의 운동입니다. 사람이 운동하지 않으면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없듯이, 전도하지 않는 성도와 교회는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 무능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전도하지 않아 영적으로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시고 12사도를 뽑았는데 그중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예수께서 밤새워 기도하시고 제자를 뽑았어도 그 중에 자신을 판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빌미로 기도의 무익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자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12제자 중에 포함시키셨을까요? 그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41편 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여기서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뜻합니다. 그리고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내 뜻을 이루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응답해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우리는 기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깨뜨려야 합니다. 기도하면 자기의 뜻과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에 친히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과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기도가 응답이 되어야만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소원대로 응답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되어야 가장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최고의 것을 주시고 싶어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시고 평지에 내려오시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든 이유는 병 고침을 받기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손만 닿으면 모든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 예수님의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기도하므로 성령의 능력을 입었기 때문이다. 답은 후자입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병든 자들을 모두 고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인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매어달려 간구할 때에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로 기도하던 주님께서는 우리이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약하고 부족하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방법은 바로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많은 능력을 맛보기 원하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역대하 16장 9절은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풀시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40일 금식 후 원주에 있는 치악산 기도원에서 하루에 17시간씩 40일을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17시간을 기도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밥 먹고 잠자는 것 외에는 오로지 기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에 전념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희한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나가라고 명령하면 사람들이 쓰러지면서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제가 그때에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능력은 기도의 양에 비례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려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배웠다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인물이 잘났다고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어 기도하는 자를 사용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간절히 기도하므로 능력을 받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죽어가는 자들을 살릴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배우기 위해 한발자국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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