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본문은 귀신들렸던 거라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귀신에게 놓임을 받는 과정과 귀신들렸던 자가 고침 받았을 때에 거라사 지역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다는 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은 실제로 존재하며 사람에게 악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영화 속에서만 등장하는 가상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속에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제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귀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어도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귀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귀신 이야기를 하면 우아하지 못한 크리스천으로 생각하든지, 혹 광신자처럼 생각하든지, 혹 이단의 아류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왜 성경은 분명히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이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귀신이 영적존재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귀신은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까지 속여서 넘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일하는 것을 교묘히 위장합니다. 셋째로,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말 믿는다면 성경에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면 당연히 귀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귀신의 존재를 명백히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성경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귀신에게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귀신들린 자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그가 소리를 지르고 벗은 채로 무덤 사이를 돌아다니고, 얼마나 힘이 센지 자신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끊어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귀신들린 자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단지 불쌍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귀신들린 자의 삶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귀신과 친밀하면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과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귀신에게 단지 생각으로 영향을 받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종종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고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모두 귀신에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몸 안에 귀신이 들어오도록 허용한 경우입니다. 귀신이 사람의 몸 안에 들어오는 이유는 각종 질병으로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보면 귀신을 쫓을 때에 병을 고침 받은 경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귀신이 몸 안에 있다가 쫓겨 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베뢰아 김기동 목사처럼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귀신에게 사로잡힌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소위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귀신이 사람의 생각을 통제하기 때문에 귀신의 생각에 따라 사람을 행동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거라사인의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29절). 여기서 ‘붙잡았다’는 말은 사로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귀신과 친밀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귀신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멸망을 크게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왜 귀신과 가깝게 지낼수록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정확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마귀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인생을 도둑질하고 멸망시키는데 있기 때문에 귀신과 친밀할수록 크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호수에 들어가 몰살을 당한 것은 돼지들이 귀신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을 가까이 하고 귀신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려서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던 거라사인이 어떻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예수께서 그를 사로잡고 있던 귀신을 쫓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어서 알고 있듯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서 “부르짖으며 엎드려 큰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먼저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먼저 더러운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귀신들린 거라사인이 귀신에게 해방된 것은 예수님을 귀신을 쫓아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만나셨지만 귀신을 쫓지 않으셨다면 그는 귀신에게서부터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알아서 도망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신을 쫓아야지만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귀신을 쫓아내셨고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귀신을 쫓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귀신을 쫓을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귀신을 쫓는 것을 사역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축사사역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신 것은 치유를 3대 사역 중의 하나로 인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축귀는 사역의 옵션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다음은 ‘예수의 이름’을 자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름은 죄의 대명사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충만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전능자의 이름인 예수라는 이름을 마음 껏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라”(막 16:1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용하는 곳에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자주 사용해서 귀신을 쫓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귀신을 쫓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의 양 손을 하나는 머리위에 다른 하나는 가슴 위에 얹으십시오. 그리고 따라서 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내 생각에 영향을 주는 악한 영은 떠나갈지어다. 내 안에 들어와서 각색 질병을 일으키는 악한 영을 떠나갈지어다. 우리 가족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갈지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과정을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귀신의 이름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자기의 이름을 군대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자신의 이름을 군대라고 한 것은 거라사인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자기의 이름을 군대라고 하면서 자신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무저갱이란 ‘바닥이 없이 깊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뜻합니다. 일명 ‘스올’(음부), ‘지옥’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귀신은 자기를 무저갱으로 들어가게 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하다가, 마침 근처에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 것을 보고서는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귀신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곧바로 귀신을 쫓으시지 않고 먼저 이름을 묻고 대화를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귀신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교제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듯이 귀신과 얼마든지 대활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할 때에도 대화를 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귀신에게만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도 우리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어떤 자를 가까이 하는지를 아십니까? 하나님과 틈이 벌어진 자를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살고, 원망과 불평을 하고, 감사한 마음을 잃고 살고 있고, 육신의 생각과 정욕대로 살아가는 자를 가까이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귀신을 멀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틈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순간 귀신은 우리와 친밀해집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해지면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가까이 함으로 귀신이 멀리 떠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돼지 떼를 치던 자들이 돼지 떼에게 귀신이 들어가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고 귀신들렸던 자가 온전하게 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그런 사실을 알자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가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그 지방에서 떠나가시기를 구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쫓아내신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2,000마리나(막5장) 호수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의 돼지 떼도 호수에 들어가 죽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리면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단지 2,000년 전, 거라사 지방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돈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세의 징조중의 하나로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보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돈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 몇 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거절하는 어리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 방석위에 앉으려고 하지 말고 믿음의 반석위에 서려고 해야 합니다. 보화를 발견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산 자처럼 유업으로 받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앙생활은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입니다. 마귀는 틈만 보이면 우리를 가까이 하여 우리의 인생을 파멸로 인도합니다. 이제 주님을 가까이 하므로 귀신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귀신이 활동하는 징조가 포착되면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쫓아야 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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