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두 여인의 병을 고치신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써 고침을 받았고, 회당장의 열두 살 어린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두 여인에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 12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12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가지고 두 사건을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믿음과 지혜’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레서 오늘 설교 제목은 “신앙생활은 믿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각종 문제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 중에는 어렵지만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회당장 야이로도 그런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도 수없이 많은 문제를 해결했지만 죽어가는 열두 살 된 외딸을 고쳐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그냥 지켜봐야만 하는 회당장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에서 설교하며 또 설교할 자를 정하기도 하고 회당의 교육과 규율을 책임졌던 사람으로 사회적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회당장이 당시 젊은 청년인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딸의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간청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40절을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아오시매 무리가 환영하니 이는 다 기다렸음이라”(40절). 예수께서 돌아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디서 어디로 돌아오셨다는 것일까요? 거라사에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 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눅 8:26). 그런데 예수께서 거라사에 다녀오시기 전, 갈릴리에 계실 때에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이렇게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에 믿음이 생겨서 예수님께 딸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 엎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입니다. 종교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뜻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믿음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상황에 눌려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이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기도한다면 이는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어 기도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까? 말씀은 영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힘을 쓸 수 없듯이 영의 양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영적인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할 힘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날마다 큐티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영의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영의 양식을 섭취해서 믿음을 갖게 하려고 큐티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 종말이 가까울수록 믿음이 있는 자를 만나기 힘들까요? 너무 바빠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식사를 하듯이 영의 양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문제를 만나도 하나님께 나아갈 힘조차 없어 세상 사람들처럼 문제에 치여 무능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기도할 힘을 얻어 주님께 나아가 간구하므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회당장의 애절한 간청을 들으시고 그를 따라 가실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2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열두 살 된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예수께서 가실 때에 우리가 밀려들더라.” 이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5장 24절을 보면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참조, 마 9:1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라는 것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회당장의 간청을 듣고 즉시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시기 위해 회당장을 따라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회당장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곧 자기의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로 부풀어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 가에 믿음으로 손을 댄 것을 아시고 가시던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치료해주시고 계속 말씀을 하셨습니다. 곁에서 혈루증 여인이 치료받는 과정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회당장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한편으로는 혈루증 여인이 고침받는 것을 보면서 자기 딸도 곧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곧바로 발길을 자기 집으로 옮기시지 않았기 때문에 혹 예수께서 도착하시기 전에 자기 딸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집에서 보낸 사람이 와서는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때 회당장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 한켠으로는 예수님의 길을 가로 막은 혈루증 여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좀 더 빨리 움직이시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2세의 꽃다운 나이에 딸을 잃은 아픔 때문에 가슴이 무너져내렸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12세로 여자의 운명이 갈리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남자는 13세에 성인식을 하지만 여자는 12세에 합니다. 그래서 12세 이하는 어린 소녀이지만 12세가 되면 성인 여자로 엄격히 구분합니다. 이렇게 열두 살을 기준으로 어린 소녀에서 성인 여자로 구분하는 이유는 십이 세부터 월경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가 12세라는 것은 결혼으로 인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인생의 꽃도 피우지 못하고 죽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극도로 절망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50).
무슨 말씀입니까? 한마디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무엇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께서 그의 딸을 살리실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회당장이 처음부터 예수님께 나갈 때부터 믿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았다면 회당장이 죽어가는 어린 딸을 놔두고 예수님께 찾아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회당장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 가졌던 첫 믿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과 함께 있지만 실제적으로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상황에 따라 능력이 제한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자를 살리실 수도 있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인하여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처음에 가졌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갈 때에 믿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분께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믿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최고의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을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이성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처음에 주님께 나아갈 때에 가졌던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믿음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뛰어넘는 믿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처음에 주님께 나아갈 때 가졌던 이 믿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주님께 나아갈 때에 가졌던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마음에 간직만 하고 있지 이 믿음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믿음과 표현된 믿음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압니다. 우리는 믿음을 내 안에 가두어 두지 말고 밖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밖으로 표현하면 어떤 문제를 만나도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처음에 가졌던 믿음을 삶 속에서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밖으로 나와서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시 왜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 위해 가시던 중 혈루증 여인의 병을 고치셨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갔다는 것을 아셨어도 그냥 회당장의 집으로 가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당장의 딸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혈루증은 당장 지금 죽고 사는 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냥 지나치시지 않고 제자들과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혈루증 환자를 고쳐주시고 그녀와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48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당시 혈루증 환자는 12년간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수께서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옷가에 손을 대자 고쳐주셨습니다. 12년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옷가에 손만 대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주님께 나가자 해결받았다는 것은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도 주님께 믿음을 갖고 나가면 해결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가면 아무리 오래된 문제라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오래된 문제나 갓 생긴 문제나 큰 문제나 작은 문제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갖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지금 해결해주십니다.
지금까지 기도했지만 아직도 해결받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습관적인 기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불신앙을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면 평생 해결받지 문제, 지금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만 더 살펴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56절입니다.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고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기적의 현장에 함께 한 자들은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제외하고는 부모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현장에는 부모만 참석하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예수께서 처음부터 이 기적을 부모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혹자는 죽은 아이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자는 말로는 전하지 말라고 하셨어도 실제로는 가서 전하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반어법으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신 후, 이를 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와 전하지 말라고 한 경우를 비교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께서 거라사 광인을 치유하신 후에는 그에게 예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눅 8:39).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신 후에 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사건에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장소는 거라사이고, 죽은 자를 살리신 장소는 갈릴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라사는 이방지역이라 유대인들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었지만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말이 당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런 소문이 백성들에게 퍼지면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게 되어 그들이 더욱 더 예수님을 죽이려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하신 때에 죽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빨리 죽임을 당하시지 않기 위해서 그들에게 침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때와 장소를 분별해서 사역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사역을 지혜롭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믿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니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뱀을 지혜롭다고 하신지 아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도록 지혜롭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뱀이 직접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했다면 그는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와에게 먼저 먹게 하고 하와로 하여금 아담에게 먹게 하므로 성공한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믿음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불협화음을 만들어냅니다. 세상 지식이 많아도 지혜가 없으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지혜롭게 처신하면 얼마든지 고난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혜롭게 행동하면 연단의 시기가 단축되고 성공적인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혜로 험난한 세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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