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소위 말하는 예수님의 ‘수난예고’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수난예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이 수난예고를 언제 누구에게 말씀하셨고, 수난예고를 들은 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언제’ 말씀하셨는지를 보겠습니다. 43절 하반절 입니다.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언제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까?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놀랍게 여길 때입니다. 본문에서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이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갖가지 기적을 행하신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께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일로 놀라고 있을 때에 자신이 곧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하필이면 그런 상황에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잘못 알고 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예수님을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빵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으로 알고 좇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이처럼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빵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예수께서 단지 이런 목적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평소 가지고 있던 능력으로 자신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들을 처단하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갖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중요하게 생각지 말고 그 이면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그분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런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는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표적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수난예고를 ‘누구에게’ 하셨습니까? 제자들입니다. 다시 43절 하반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신 대상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말씀하셨죠? 수제자들이 예수께서 변화산에서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을 본 때였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수난예고와 두 번째 수난예고와의 간격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또 다시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께서 말씀하신 수난예고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45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45절 상반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거듭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께서 두 차례나 말씀하신 수난예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실 때마다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 같지 않게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를 말씀하실 때는 변화산에서 변형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기적을 연출하셨고, 두 번째 수난예고를 말씀하실 때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면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능력을 행하시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능력과 기적을 연출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께서 무능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상황에서도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때는 오전 9시이었고 운명하신 시간은 오후 3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전, 12시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한 현상이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성소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까지도 능력과 기적을 연출하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끝까지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힘이 없고 무능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시는 분으로만 알았지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도, 그리고 그분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고 말씀하신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께서 계속해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어도 무슨 의미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사랑하는데서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떠나있으면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이미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람난 여인이 가정에 관심을 갖지 않듯이 우리가 음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주일에 예배당에 앉아있지만 세상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자주 들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숨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45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숨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의 둔감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셔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가이샤라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스스로 창조주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하셔야만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비밀이라고 합니다(엡 6:19). 비밀이란 숨겨진 상태에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미 공개되어 저와 여러분이 이미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복음을 비밀이라고 할까요? 복음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 매 사건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끝까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보십시오. 그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형들에게 팔려서 종살이를 하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써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때에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직면한 종살이와 옥살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려운 날들을 넉넉히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믿음이 없었더라면 자신이 당한 세 가지 재앙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그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세 가지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우리가 어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므로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하시자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5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제자들은 예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상이겠습니까? 그것에 대해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제자들이 묻기를 두려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두려워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음에 대해 자꾸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자신들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묻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 더 묻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자 삼으라는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묻기를 두려워하는 제목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는 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를 죽여야 하는데 그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주님께 묻고 또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죽지 않으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고야 맙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사람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하고 온전히 죽기 위해 주님께 그 방법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묻기를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해 재차 언급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돌아가시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될까요? 요한복음 16장 5-7절을 읽겠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께서 돌아가셔야 성령께서 오심으로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영으로 존재방식을 바꾸셔야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으로 존재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을 버려야 하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곧 재림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까요? 주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우리는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세상으로 가서 제자 삼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할까요? 한 영혼을 전도하여 구원하는 것도 엄청난 일인데 제자를 삼아 전도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 묻기를 두려워하는 주제가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라, 기도하라, 전도하라, 제잠 삼으라, 날마다 죽으라 등등. 그러나 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마다 죽으면 됩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서 하게 하십니다. 원수도 용서하게 되고, 전도도 하게 되고, 기도도 하게 되고, 주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에도 순종하게 됩니다. 날마다 죽음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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