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것을 봐 왔습니다. 누가는 오늘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계속해서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혹 ‘제자들이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한동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항상 이 세상의 것을 생각했는데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셨습니다. 즉 가치관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은 3년에 불과했습니다. 3년 만에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제자들보다도 신앙생활을 적게 한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적어도 10년 이상은 다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보다 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책망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봤듯이 누가는 1장에서 9장 50절까지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하시고, 가르치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기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부터 19장까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5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본문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고 말하면 되는데 왜 굳이 그곳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시는 이유가 단순히 여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육신적으로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에 심적으로 느끼는 고통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피하고 싶은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굳게 결심을 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을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예수님만 가시고 싶지 않은 곳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가고 싶지 않은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예루살렘이 어디 입니까? 그곳은 우리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희생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희생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곳을 가기 위해서는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그 길을 걷겠다고 굳게 결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처럼 희생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결심하신 것처럼 우리도 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결심을 한번 만 해서는 안 됩니다. 계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이슬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날마다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면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습니까? 5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예수께서 돌아가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 대신 ‘승천’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 죽음이 생략되고 승천할 기약이 찼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런 결심을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승천이라는 영광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희생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결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면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불하는 고통에 대해 장차 상이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하면 얼마든지 고통을 당하기로 굳게 결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는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장차 누릴 영광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상을 주신다는 확신을 굳게 가지면 가질수록 고통당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과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당시 예수께서 계신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돌아서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왕하 17:24-41;요 4:9). 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에 가시려고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52-5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본문은 사마리아 백성들이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배척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그의 일행을 배척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사마리아인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배척했을까요?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만 예배로 인정하고,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즉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알 뿐 아니라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께서 자신의 주인이시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할까요? 예수님보다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거절하지 않기 위해 세상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거하시기에 합당한 성전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몸이 주님께서 거하시기에 불편하셔서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면 얼마나 불행한 자가 되겠습니까?
사마리아인들에게 배척을 당하시자 제자 중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히려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돌아보시며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절을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그것을 직접 심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를 섬기라고 부르심을 받았지 그들을 심판하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는 첫 걸음부터 사마리안 사람들한테 모욕을 당했습니다. 마땅히 존경받고, 대접받고, 칭송을 받아야 할 분이 멸시천대를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화를 냅니다. 대노합니다. 그리고 원수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음의 요동함이 없이, 자신이 가야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매우 유용한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입힌 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고 악을 선으로 갚으면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무시당했다고 그것을 그대로 갚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악을 악으로 갚을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들에 대한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기 위해서는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복을 거듭하므로 결국은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반복을 훈련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듯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훈련하면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십자가는 작심해야지만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그냥 그리스도인입니까?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감으로 주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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