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57-62절 대가를 지불해야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2016.8.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이 3명이나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57절의 ‘어떤 사람’이고, 두 번째 사람은 59절의 ‘또 다른 사람’이고, 세 번째 사람은 61절의 ‘또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평행귀절인 마태복음 8장 18-22절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다.”
먼저, 마태는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을 서기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첫 번째 사람’은 제자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만 소개하고 있고 세 번째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9장 62절을 읽으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자신을 좇겠다는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라는 말은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가 뒤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로 주님을 좇겠다고 말한 자 역시 제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겠다고 말한 세 사람에게 각각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각각 다르게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좇아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과 첫 번째 사람인 서기관과의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5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께서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따르겠다고 말한 제자에게 어떻게 하라고 대답하시지 않고 단지 자신이 처한 상황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왜 예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자신이 이토록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왜 서기관이 자신을 따르겠다고 했는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세상에서 소위 형통한 삶을 살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서기관처럼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려는 생각으로 주님을 좇을 수 있습니다. 즉 기복신앙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물론 기복신앙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기에 복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복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될 지라도 주님을 좇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만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수단과 방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주님을 따르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상을 받는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8-31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금세와 내세에 상을 받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단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는 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받을 상을 약속한 것이지 주의 상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상 주심의 확신을 갖고 주님을 좇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상 받는 것을 우리의 신앙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더욱 더 순순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두 번째 사람과 대화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59절을 읽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과 두 번째로 대화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께서 왜 제자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아마도 제자가 예수님과 서기관과의 말씀을 엿듣고 자신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자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주님의 제자가 된 자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더욱 더 주님을 온전히 따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제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했을 때에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두 번 째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언뜻보면 제자가 예수님과 대화할 때에 마치 부친 상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일 당시 제자의 부친이 죽었다면 예수님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부친의 상중에 있었다면 당연히 그의 집에서 조문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만일 실제로 부친이 죽은 경우라면 예수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죽은 자’라고 했어야 합니다. 즉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자가 예수님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장차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 아버지를 장사를 치룬 후에 예수님을 좇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제자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할 때에 예수께서 “먼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제자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된 후나, 아이들을 다 키운 후나, 세상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다음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구원받을 때고 지금이 은혜받을 때고 지금이 주님께 충성할 때입니다. 장차 뭔가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정 반대로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 무엇을 하겠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지금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뜻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라는 것이고, 먼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내려놓고 먼저 주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지 않고 다른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큐티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를 할 때에 이 순서가 바뀌게 되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리더십의 대가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우선적인 일을 구분하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는 우선적인 일을 구분하고 그 일을 먼저 해야 하는 자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가장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 번째 사람과 대화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세 번째로 대화를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이 세 번째 사람 역시 제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주님을 따르기 전에 가족과 작별을 하고 좇겠다고 하자 예수께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제자가 이렇게 말을 하면 예수께서 “나를 따르기 위해 가족과 작별까지 결심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는 가족공동체의 결속력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갖는 것조차도 쉬운 것이 아닌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그런 심정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과정에서 가족과의 이별을 고려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가족과 이별을 각오하고 주님을 좇겠다는 제자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쟁기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농사꾼의 아들이라 쟁기가 무엇인지 압니다. 농촌에서 밭이나 논농사를 할 때 사용하는 농기구입니다. 그런데 쟁기를 사용해서 밭이나 논을 갈 때에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분명해지지 않아 곧게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족인사를 하고 주님을 좇겠다고 말한 제자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과연 문자 그대로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 될까요? 종종 선교사들이 사역지로 떠나기 전 교우나 육신의 가족들과 식사도 하고 가족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제자가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이냐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가 가족과 작별하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에 예수께서 그런 자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하지 다른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매여야 하고,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무엇이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데 심각한 장애가 된다면 끊어야 합니다. 대사를 계획하고 추진하던 중 가정사 때문에 대사를 망친 사례가 있습니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그 조약에 반대하여 많은 의병들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일제에 대항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모여 마침내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각도에서 모인 자가 약 l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당시 의병들의 총대장은 이인영이었습니다. 그런데 1908년 서울로 진공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시 유교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불효는 불충이다”라는 논리를 앞세워 지휘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의병 연합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은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무위로 끝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가정사 때문에 그 길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자에게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장 큰 가치를 추구하는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단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치에 합당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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