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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지난 달 7월 6일은 체코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가 순교당한 지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성경에 근거한 진실한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특별히 그가 죽은 후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항의 종교개혁문을 선포했는 데, 이는 후스의 개혁적인 삶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보름스에 세워진 루터의 동상에는 루터에게 신앙과 신학적인 영향을 준 4명의 선배들의 동상이 있는 데, 그 중에 하나가 얀 후스다.
얀 후스(1372~1415)는 마르틴 루터보다 100년 앞서 활동한 체코의 종교개혁자다. 그의 선구적 종교개혁 사상은 체코 민족의 형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이는 그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심하게 미움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루터가 강력한 군주의 지원을 받고 보호를 받은 것에 비하면 후스는 어떤 권력이나 신학적인 그룹의 지원도 받지 못한 그야말로 외로운 개혁자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악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고 선이 위대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는 체모 국민들 신앙 깊이 새겨져 있다. 지금도 그의 동상은 체코의 수도 프라하 시내 가장 중심부의 광장에 우뚝 세워져 있다.
그의 유년기는 어려웠다. 그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위해 진지하게 기도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을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후스는 어머니의 기도처럼 교회의 사제가 되기를 꿈꾸었다. 당시 사제가 갖고 있었던 명성을 얻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 프라하로 가게 되었다.
그는 프라하에서 황제 카를 4세가 세운 카렐 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에 힘썼고 마침내 카를 대 교수가 되고 1409년에는 총장이 되었다. 취임 연설에서 “어느 누구도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유명한 설교 “내가 성경을 알았을 때”에서 그는 “나는 어렸을 때 빨리 사제가 되어 좋은 집에 살며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성경을 알게 되면서 그것이 악한 욕망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사는 삶을 실천한 개혁자였다.
말씀을 깊이 사고한 후스에게 당시 카돌릭의 행태는 성결 진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직이 돈으로 매매되고, 성찬은 형식뿐이었다. 수도사들의 성적 문란도 심각했다. 이는 곧 성경의 권위가 떨어진 결과였다. 그는 성경 권위의 회복을 선포한 영국의 위클리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난해하고 어려운 라틴어 대신 체코어로 설교하므로 성도들이 알아듣기 쉽게 했다.
그가 교회를 향한 강력한 회개를 촉구한 것이 카돌릭의 권위를 거스려 성무금지령의 처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 ‘거리의 설교자’가 되었다. 1414년 말 콘스탄츠 회의에 출두 명령을 받았다. 주제는 ‘권위의 출처’ 문제였다. 반대파들은 ‘공의회의 결의에 권위의 궁극적 원천이 있다’고 주장, 후스는 ‘권위의 유일무이한 원천은 성경’이라고 하였다. 결국 7월 6일 소집된 회의에서 후스는 이단으로 정죄되고 사형선고를 받아 화형을 당하고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삶은 영원히 남아 있다.
최한주 목사 <푸른숲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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