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주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귀신들이 항복한 것으로 기뻐하자 예수께서 하늘나라에 그 이름이 기록된 것을 가장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현상보다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1절)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귀신들이 쫓겨나간 것을 보고하자 예수께서 성령으로 인해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을까요? 그것은 70인들을 통하여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고 있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요한이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1 3:8)라고 말한 대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70인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복음을 증거할 때에 귀신이 항복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즉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하자 마귀가 항복하고 그들이 사로잡고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때문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쁨을 성령이 충만한 상태와 연관시킴으로 그의 기쁨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일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로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듣고서 기뻐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신 다음에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2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21절).
먼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면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까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에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치신 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했을 때,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대답하자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으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증인이 그들입니다. 여호와 증인은 아버지와 아들을 같은데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느냐며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같다는 말을 세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개념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해하면 얼마든지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시 하신 것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존재의 방식을 바꿔서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죄 문제를 해결받지 못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 못한 분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후 기도를 드리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종종 먼저 감사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기도하실 때도 먼저 감사하셨고(요 11:41), 성찬식을 하실 때도 먼저 감사하셨습니다(눅 22:17). 왜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종종 먼저 감사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감사는 하나님과 대화의 문을 여는 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대화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으면 상대방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감사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시 21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숨기시고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셨습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절대 의존관계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은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머리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지 않습니다. 자신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것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기도 하고 알지 못하기도 한 것이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21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렇게 영적체험을 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각각 복음에 대해 보인 반응의 결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적 체험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스스로 지혜 있고 똑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구원을 받고 영적체험을 하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가 어린아이처럼 행동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것은 복음을 듣고 각자가 보인 반응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각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을 받기 위해서는 항상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께 절대의존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2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셨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3-24절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3, 24절)
예수께서는 기도를 마치신 후 제자들을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들을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제자들은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하나님의 계시가 성취되기를 소망하였고 바랬습니다. 그러나 직접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를 보았고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였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들보다 더 복이 있는 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메시아를 만났을 뿐 아니라 그분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18-19절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감사를 잃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영안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자주 닦아야 밝히 볼 수 있듯이 무뎌진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닦으면 깨끗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많이 닦을수록 우리가 얼마나 복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의 풍요와 지식의 풍요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영혼은 더 피폐하여 기쁨과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자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면 누가 뭐래도 가장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가장 큰 복을 받은 자답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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