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장 38-42절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 배운다 2016.10.2.
오늘 본문에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르다의 집에 예수께서 방문하셔서 발생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베다니 마을에 있는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속상해 하면서 예수님께 자기 동생에게 자기의 일을 도우라고 예수님께 청했다가 오히려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이야기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습니까? 전통적으로 이중적인 틀에서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즉 마르다가 주방에서 봉사하는 일은 육적인 것이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봉봉사보다 영적인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동안 이렇게 해석을 했을까요? 그런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본문 42절에 있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가 ‘이 좋은 편’을 선택했다는 것을 근거로 봉사보다는 말씀을 듣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좋은 편’은 봉사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로 ‘good part, good porti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사도행전 6장 2-4절입니다.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재정 출납을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이 말씀을 언뜻 보면 마치 기도와 말씀사역은 중요하고 재정 출납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기도와 말씀사역이 재정출납을 하는 것보다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재정 출납보다 기도와 말씀사역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기도와 말씀사역을 하지 않고 재정출납만 일삼다가 문제가 발생하니까 평신도에게 재정출납을 맡기기로 하고 사도들은 기도하고 말씀사역에 전무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근거로 봉사를 하는 것보다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사실은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동생 마리아가 도움을 주지 않자, 예수님께 동생이 자신을 도우라고 요청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리아의 처신이 전통적인 관습에 걸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여인들이 배우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랍비들이 여인들 앞에서 토라를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떨어져서 말씀을 들은 것도 아니고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한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인은 손님을 영접한 경우 책임을 지고 접대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서 자기의 집에 오시자마자 동생에게 자신을 도와 음식을 준비하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언니의 말을 무시하고 돕기는커녕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실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자신의 일을 도우라고 요청했을 때에 마리아에게 도와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도리어 마르다를 책망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살펴본 대로 마르다가 먼저 말씀을 듣고 봉사를 해야 하는데 말씀을 듣지 않고 주방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주님을 어떻게 대접해야 드려야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전통을 앞세워 자신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주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할지라도 주님의 뜻과 무관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르다처럼 자기 생각대로 살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분주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40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 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본문은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을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관습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오셨기 때문에 마르다가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분주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어성경은 ‘distrac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집중이 안 되게 하다’, ‘주의를 딴 데로 돌리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분주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데 방해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마음이 빗나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영접했는데 마음이 주님께서 떠났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근데 말이 됩니다. 주님을 예배해도 주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르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집중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좇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 40절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마르다의 가족을 세 사람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의 남편에 대한 소개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추측할 수 있을까요? 마르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마르다가 결혼 후 사별한 후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에게 음식 만드는 일을 도우라고 얼마든지 지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언니의 말을 듣지 않고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마르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자기의 말을 듣지 않은 것 때문에 마음의 큰 상처를 입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말한 어투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불평과 원망이 가득찬 어투입니다. 마르다가 불평과 원망을 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내가 말한 대로 상대방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내 생각대로 상대방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자들에게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자기의 생각과 뜻대로 말하지 말고 그들을 향해 주님께 어떤 계획이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다고 자기의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하면 반드시 상처를 받습니다. 왜 부모가 성장한 자식들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어렸을 때는 자기의 생각대로 따랐지만 성장한 후에는 부모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를 여러분의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목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알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혹 상대방이 자기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염려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41절입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성경은 마르다가 예수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마르다가 염려하고 근심한 ‘많은 일’이란 무엇일까요? 마르다는 지금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직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많은 일’이란 실제적으로 많은 일을 했다는 뜻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녀가 음식을 준비하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다가 음식을 준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기 여동생처럼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한 어투를 보면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손님을 맞이한 주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극진히 대접을 해야 했기 때문에 또한 음식을 잘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다는 두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나뉘어졌기 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가셨습니까? 그녀에게 염려와 근심을 주려고 가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시기 위해서 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가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섬기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염려와 근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와 근심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뜻을 따르면 염려하고 근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육신의 생각을 좇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혹 지금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좇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한가지만 해도 만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만족이 없었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생각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마르다의 집에 어떤 분이 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마르다의 집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마르다가 예수님을 모시는 과정에서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 오르는 수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맹인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쳐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많은 장애를 극복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와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시 얼굴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예수께서 지금 자기 집에 와 계십니다. 따라서 마르다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마음이 어땠습니까?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마르다가 만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왜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뜻을 찾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앞세워 모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내 생각을 앞세우면 마르다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늘 분주하고, 자기의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고 하다 마음의 상처를 받고 여러 가지 일로 염려와 근심하게 되고 만족이 없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늘 마르다가 예수님께 그녀의 생각대로 주님을 대접하다가 책망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죽이겠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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