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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

누가복음 안창천 목사............... 조회 수 298 추천 수 0 2017.07.04 23: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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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1:37-44 
설교자 : 안창천 목사 
참고 : d3왕의사역 평신도제자훈련원 http://d3.or.kr 

외식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따릅니다

눅11:37-44절

2016.12. 11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저주하신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저주하신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태복음(23장 1-36절)은 마가복음(12:38-40)과 누가복음(39-47)보다 이것을 더 소상하게 다루고 있지만,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 화를 저주하신 배경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것은 누가복음밖에 없습니다.


그럼,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저주를 쏟아 부으신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37-3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저주하신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주하신 장소는 바리새인의 집입니다. 우리가 일단 바리새인에 대하여 좀 더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등 여러 종파가 있듯이, 당시 유대교에는 세 개의 종파가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세네파는 현실 도피적인 종파였습니다. 수도원처럼 엄격한 규율과 폐쇄된 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세례요한이 에세네파 출신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권력과 결탁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막강한 권력과 부를 누렸던 정치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지만 합리주의적인 신학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했기 때문에 천사도 부정하고 사후의 세계도 부정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자유의주 신학에 뿌리를 둔 진보적인 종파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파로서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시편과 선지자의 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기 때문에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었고 부활도 믿었습니다. 이들은 사두개파처럼 유대교의 사법기관인 공회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수적으로도 많지 않았지만, 엄격한 율법주의자들로서 성경 말씀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기 위해 구전법을 만들어 전승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중의 한 사람의 집에 점심 식사의 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전에도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죄와 의로움에 대해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이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정결예법으로 논쟁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예법을 매우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마치 배설물을 먹는 것처럼 더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시장에서 돌아오면 목욕부터 했고,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부지런히 씻었습니다(막 7:3-4). 특히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법칙이 까다로웠습니다. 물은 적어도 계란 한개 반에 들 만한 분량을 두 손에 받아서 먼저 손끝에서 손목까지 적시고, 각 손바닥으로 주먹을 닦습니다. 다음에는 두 손목에 물을 부어 손끝으로 흘러내리게 합니다. 이렇게 부정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과 동일한 죄를 짓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랍비는 감옥에서 간신이 목을 축일 만큼의 물을 얻었는데, 그것으로 손을 씻고 나니 마실 물이 없어서 죽었다고 합니다. 이만큼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정결예식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정결예법을 어기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시면 어떤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위생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에 평소에는 음식을 드시기 전, 손을 씻고 잡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바리새인이 두 눈을 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고의로 정결예법에 대한 논쟁을 끌어내서 그것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 앞에 문제를 유발시키셔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들이 체크해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은 지금껏 한번도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결예법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음식을 드시기 전, 손을 씻지 않으시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상히 여겼다’를 ‘marvelled’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을 허용하시는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을 통해서 가는 길을 되돌아보고 바른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두 양과 같아서 고집이 세고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인데도 계속해서 갑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을 당하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위를 바라봄으로 올무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지 않은 일이 닥친 경우는 주님께서 충격요법을 사용하신다고 생각하여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시려는 예수님을 보고서 이상히 여기자,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38-40절을 읽겠습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이 말씀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한데 겉만 깨끗한 척하는 것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은 온갖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는데 깨끗하게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손을 씻는 것만 중시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신을 가장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리석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그런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리석다’는 말을 사람에게는 들어도 하나님께 들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듣는 ‘어리석음’은 정확지 않고, 일시적이고, 가변적이지만 하나님께 듣는 ‘어리석음’은 100% 정확하고 영원하고 심판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리석다고 하실까요?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실까요?


그런데 예수께서 속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한데 손을 깨끗이 씻는 행위를 어리석다고 하시면서 속을 깨끗이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음 안에 있는 탐욕입니다. 그런데 탐욕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탐욕을 자기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지 말고, 가난한 자의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겉보다 속에 관심을 둘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탐욕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면 속보다 겉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보다 겉에 관심을 두는 것은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이므로 무엇을 한들 깨끗해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만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탐욕의 방향을 바꾸면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바꾸면 겉이 아니라 속에 관심을 두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8가지의 화가 나오는데, 누가는 세 가지 화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42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정통파 유대인들이 반드시 땅에서 난 7가지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즉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 꿀 등을 드렸습니다. 또 모든 과목의 처음 익은 열매 오분의 일을 드렸고, 땅에서 나는 모든 먹을 수 있는 것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정원에서 가꾸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열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그것을 칭찬하시지 않고 책망을 하셨습니까?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십일조만 넘치게 드리면 신앙이 아주 좋은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는 삶에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 바리새인들의 초점이 전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제물에 관심을 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에 관심을 두셨던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십일조에는 세 가지 기본정신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득의 십의 일을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는데, 10개 중 하나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 아홉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10개 중 하나를 주님께 드림으로 나머지 것도 다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기업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레위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 전임 사역자들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셨고, 이들을 위해서 나머지 열 한 지파가 십일조를 내어서 먹고 살도록 했습니다(민 18:24). 이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공평하게 나누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에 내는 십일조 외에 삼년에 한 번씩 각 성에서 십일조를 더 걷어서 성 안에 있는 레위인들을 포함한 과부들과 고아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도록 명하셨던 것입니다(신 14:28~29).


셋째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동맹 연합군을 물리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모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창 14:20). 이는 전쟁에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 주시고, 먹여주시고 입혀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창 28:20-22).


이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가 담겨져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십일조만 드리고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부정하고, 자신의 배만 불리고 나눔과 섬김의 삶이 없다면 십일조는 형식적인 제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의 삶에 공의와 사랑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일조뿐 아니라 주일헌금과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을 드리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이상의 헌금을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의 삶에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계속해서 다른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명예욕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명예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모두 명예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신 것은 이 정도의 명예욕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걸 맞는 명예가 아니라 그 이상의 대접을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밖에 없는데 열 개를 가진 것처럼 보이려고 하고, 하나 밖에 아는 것이 없는데 마치 열 개를 아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단지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에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당할 정도로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부터도 이런 사실을 잊고 함부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이번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이 가결되었을 때에 박근혜 대통령이 환히 웃는 영상을 보면서 순간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너무 모르는 존재구나’ 왜 과거에 박근혜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었을 때에 그렇게 환히 웃었을까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눈에 티를 크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않으면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깎아 내림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함부로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다른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44절입니다. “화 있을 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 우리나라는 시신을 무덤 안에 넣고 봉을 세우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것이 무덤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덤을 평토장을 하기 때문에 무덤인 줄 모르고 밟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매년 아빕월 15일에 평토장한 무덤에 나무나 돌을 세우고 회를 칠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가 벗겨지고 세워놓은 돌이 넘어지면 무덤인지 아닌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무덤인 줄 모르고 밟으면 7일간 부정한 자가 되어 예배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민 19:16). 그런데 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마치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신앙이 좋은 줄로 알고 그들을 존경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외식으로 하나님을 잘못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 없음을 주님 앞에 솔직히 고백하고 부족한 믿음을 채워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덤은 무덤다워야 하고 신자는 신자다워야 합니다. 그래야 무덤인 줄 알고 사람들이 밟지 않아 부정한 자가 되지 않듯이, 신자는 신자다워야 우리를 통하여 지옥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와 ‘사람이 보는 나’ ‘자신이 보는 나’가 동일한 자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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