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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행2:2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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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30072 |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행 2:22-32, 부활절 둘째 주일, 2017년 4월23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오늘 여러분들은 일상을 멈추고 예배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살이에 바빴으니 주말에는 휴식을 취해야 하고, 개중에는 주말에 더 바쁜 분들도 있습니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서 교회에 나왔다는 것은 신앙생활이 여러분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간혹은 신앙생활의 특별한 의미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가도 상실해버린 채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긴 할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생활의 성실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중심과 깊이에 대한 문제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영혼 구원, 즉 삶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그런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주일 시간을 내서 교회에 나올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단순히 복 받으려고, 죽음이 두려워서, 외로워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이 문장에는 세 가지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종말,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종말론적으로 열린 구원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부활입니다. 따라서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표현은 교회가 부활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가장 정확한 대답은 오늘 설교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독교인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모든 설교의 핵심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전통이 바로 부활의 증인이라는 사실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은 2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관한 성경의 중요한 보도를 오늘 여러분들에게 전할 테니 잘 들어보십시오.
베드로의 설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예루살렘의 한 곳에서 주기적인 모임을 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중요한 절기인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행 2장에 따르면 오순절 집회에서 제자들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열광적인 상태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방언 현상입니다. 그런 모습을 본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 제자들이 낮술 마시고 취해서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고 조롱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와 성령에 충만한 상태는 일견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어떤 다른 힘에 몰입됩니다. 무당들의 접신 상태도 현상으로서는 비슷합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광신적인 상태로 떨어지는 것은 잘못이지만 너무 정신이 말짱한 것도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고 해야 기독교인으로서는 정상적인 겁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매주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헌금 바치는 것도 제 정신이면 잘 안 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반론을 펼칩니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영에 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구약 욜 2:28절 이하를 인용합니다. 행 2:17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 수요일 오후에 12소선지서를 공부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미가 4-7장을 공부했습니다. 미 4: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듣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이런 선지자의 설교는 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주적이냐?’ 하는 공연한 말싸움이나 트집 잡기로 대통령 후보 토론회를 진행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미가 선지자의 설교가 어떻게 들릴까요?
베드로는 일단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게 아니라 구약 선지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것이라고 말한 뒤에, 오늘 설교 본문인 행 2:22절부터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는 예루살렘 주민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여기서 법 없는 자는 이방인인 로마 총독 빌라도를 가리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는 뼈아픈 대목입니다. 아무리 예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유대교 최고법정인 산헤드린이 이방인의 법정에 예수를 넘겼다는 건 유대인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비난하기 위해서 지금 설교하는 게 아닙니다. 24절 이하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시편 16:8절 이하를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미래 내다보았다고 말합니다. 31절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죽음의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입니다. 이게 예수 부활이 가리키는 핵심입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겁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포함해서 현대인들은 생명을 주로 생리적인 현상으로만 생각합니다. 숨이 끊어지면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여깁니다. 기독교의 부활 신앙을 미몽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주장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생명을 평면적으로만 보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의학과 생물학과 물리학으로 다 추적할 수 없는 깊이가 놓여 있습니다. 그걸 단순히 과학적이라는 말로 계량화하고 규정하고 재단하는 건 교만이자 어리석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교회에 김 아무개라는 교우가 있다고 합시다. 20년 전에 그는 대구샘터교회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혹은 기독교 신앙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김 아무개가 20년 후에 대구샘터교회 신자가 된 데에는 수많은 우연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아주 우연한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대구샘터교인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온갖 우연의 반복에 의한 것인데 하물며 생명 현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비록 죽음으로 우리의 몸이 지구 안에서 원소로 해체되겠지만 우리가 다 풀어낼 수 없는 비밀한 방식으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종말을 향해서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차원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부활 신앙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생명이 완성될 종말이 이미 자신들의 현재에 들어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경험했기에 그들은 그 외의 다른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절대적인 규범으로 작동되던 율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습니다. 로마 권력까지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행 2:3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기독교인의 정체성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베드로의 고백은 낭만적인 게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 증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하는 행위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법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의 법정에서도 증인은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증인들은 위증의 경우에는 처벌을 받겠다는 선서를 합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청문회에서 우리가 확인할 바이지만 증인 선서를 했다고 해서 모두 솔직하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위증으로 형사 고발당한 사람들도 여럿 나왔습니다. 예수 부활의 증인이라는 베드로의 진술은 예수 부활에 자신들의 영혼을 건다는 의미입니다.
부활 증인으로서의 삶
법정이나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서려면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처럼 부활 증인이 되려면 부활을 직접 경험해야만 합니다. 머리가 좋거나 말 재주가 있는 사람은 직접 경험하지 못해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럴듯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직접 경험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사람의 증언이 디테일에서도 확실한지를 보는 겁니다. 영천 원당리에 있는 저의 집에 와 보신 신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신자도 있습니다. 와보지 못했어도 다른 분들에게 전해들은 것만으로, 또는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제가 가끔 올리는 저의 집 풍경 사진으로 대충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당의 수도꼭지가 어디에 있는지, 이층 올라가는 층계가 몇 계단인지, 현관문 앞의 데커의 색깔이 어떤지, 바로 아랫집과는 높낮이에서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등등,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는 증언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만 하나의 정보로서 아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부활에 대한 디테일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사실 부활만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 신앙도 세부적인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적인 삶의 능력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대학교수가 자신의 전공과목에 대해서 디테일을 말할 정도로 깊이 알지 못하면 자신감이 떨어지는 거와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의 디테일을 깊이 있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부활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실력이 짱짱한 선생이 될 수 있을까요? 최선은 기독교 자체를 공부하는 겁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일단 세상살이에 쫓기기도 하고, 시간이 있어도 공부할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삶의 도구로 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설교 시작할 때 교회에 나올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습관적으로 나오기도 하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기도 합니다. 신앙을 삶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로 신앙생활을 해도 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증인으로 살기는 힘듭니다. 예컨대 음악 콘서트 장에 자주 가는 사람과 콘서트 장에서 직접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음악의 디테일에 강할까요? 모두가 기독교 신앙의 전문적인 연주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담임 목사로서 모든 신자들에게 그걸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게 생각하고, 좀더 교회공동체 안으로 깊이 들어오는 것도 다 좋습니다. 각자 형편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다. 다만 부활의 증인이 되려고 한다면 말이 전혀 달라집니다. 부활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귀찮게 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앙의 능력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고단한 연습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음악이 주는 자유를 얻는 것처럼 부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부활 신앙만이 허락하는 삶의 자유와 삶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문자나 이론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삶의 능력을 반드시 수반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베드로는 다윗의 시편16:8절 이하를 인용했다고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활 증인에게 주어질 삶의 능력입니다. 핵심적으로 죽음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사실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위로가 된다는 것은 삶의 능력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간혹 저의 설교가 영혼의 깊이에서 위로가 된다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말이 오히려 저에게 위로가 되지만 말입니다. 설교에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곧 삶의 능력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위로가 곧 능력입니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월급 2백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하면서 힘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많은 월급을 받는 사람이 부럽겠지요.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부럽겠지요. 그런데 회사의 운영 방침이 바뀌어서 높은 자리에 있거나 낮은 자리에 있거나 상관없이 모든 직원들이 시간 당 3만원씩의 임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변화가 큰 위로가 되고, 삶의 능력이 됩니다. 부활은 생명의 전적인 변화라고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지금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실감이 여전히 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래도 또 극단적인 예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습니다. 아주 속히 그 순간이 옵니다. 우리가 다 죽음으로 변화됩니다. 절대적인 변화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모두 소멸의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부활이 실감이 안 가면 일단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부활은 절대적인 사건인 죽음마저 넘어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근원적인 위로이며, 따라서 삶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원시 기독교의 원초적인 신앙고백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 고백을 듣고 가슴이 뛰는지요, 아무런 감동이 없으신지요, 어떻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양심적으로 소신껏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외침을 여러분의 영혼에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세상의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또한 두려워하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남은 인생을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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