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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4:18-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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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16.10.30 희망의교회 http://hopech.kr |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
창44:18-3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성숙된 성도일 것입니다. 성숙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온전히 의지합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성숙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숙된 성도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수십 년간 해오면서 과연 얼마나 성숙되었습니까?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렇게 성숙된 성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막내 동생 베냐민이 노예로 끌려가게 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애굽의 총리에게 탄원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베냐민을 위해 자신이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름답게 성숙된 성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죽기까지 아버지를 신뢰하셨고, 우리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오늘 당신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리고 사람이 보기에 정말 아름답게 성숙된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함정에 빠진 형제들
요셉의 형들은 어렵게 아버지를 설득하여 베냐민을 데리고 양식을 사기 위해 애굽으로 왔습니다. 이제 약속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는 갇혀 있던 시므온을 풀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을 모두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하게 했습니다. 이제 형들은 양식을 충분히 사가지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베냐민도 이렇게 무사히 데리고 돌아가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총리의 청지기가 황급히 뒤쫓아 오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총리의 청지기는 형들에게 왜 은혜를 배신하고 총리의 은잔을 훔쳐갔느냐고 추궁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형들은 자기들의 자루를 조사해보라고 했습니다. 맏형 르우벤의 자루부터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사가 거의 다 끝날 때가지 문제의 은잔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베냐민의 자루에서 바로 그 은잔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정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베냐민 자신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베냐민은 애굽 총리의 물건을 훔치고 총리를 능멸한 죄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그토록 장담을 하면서 겨우 데리고 왔던 베냐민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탄원
형들은 다시 총리 요셉 앞으로 끌려왔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형들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형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들이 지은 죄를 이렇게 심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과 함께 모두가 종이 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베냐민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총리에게 자기들이 모두 종이 되겠다고까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버지에게 가서 할 만큼 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아무도 그냥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다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나 베냐민을 위해 애굽의 총리에게 탄원을 했습니다. 베냐민을 위한 유다의 탄원은 비장하고도 감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해서 베냐민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말했습니다. “총리께서 우리 막내 동생을 데리고 와야만 곡식을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이 아들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절대로 보내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겨우 이 동생을 이렇게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27-31절)
계속해서 유다는 왜 자기가 베냐민을 대신해서 남아야만 하는가를 설명했습니다.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32-34절)
변화된 모습
요셉은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셉이 그렇게 한 것은 복수도 아니었고 심술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반드시 확인해야만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과연 과거의 악하고 추한 생각과 행실을 버렸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죄 없는 동생을 팔아버렸던 그 일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것이 왜 필요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을 이루실 것인데, 그러한 죄를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요셉은 이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과거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요셉과 형들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과거의 죄를 회개했는지, 이제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는지를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함정을 파서 상황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일단 형들이 보여준 반응은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예로 끌려가게 된 동생 베냐민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찢으며 돌아와서 베냐민과 함께 노예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베냐민만 남겨두고 모두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아무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를 찾아내시고 심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들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다시는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없다!
특히 유다의 변론은 요셉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했을 때 누구보다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만일 베냐민을 데리고 돌아가지 않으면 아버지는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죄 없는 동생을 팔아버렸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아직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실 형들은 요셉이 똑똑하고 잘난 척한다고 미워하고 시기해서 죽이려다가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없어졌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버지는 몇날 며칠이고 식음을 전폐하고 슬피 울었습니다. 그 누구도 슬픔과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거나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야곱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객지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기가 막힐 일을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결코 울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강했던 야곱이 요셉이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그렇게 슬퍼하며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전혀 딴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을 팔아버렸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고,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늙은 아버지가 요셉 대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베냐민이 또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일이 잘못되어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아버지는 더 이상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생명을 걸고 애굽의 총리에게 간곡하게 탄원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베냐민만은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건 유다
유다는 베냐민을 위해 구차한 변명을 하거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애가 아직 어려서 실수를 한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가 이 아이를 잘 지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해서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도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베냐민이 노예가 되는 일은 많은 형제 중 하나가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말한 것이었습니다. “만일 이 아이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우리 아버지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집안은 파멸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집안이 모두 이 아이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베냐민을 책임지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베냐민 대신 자신이 노예가 되고 베냐민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그냥 그렇게 말해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서 죽거나 노예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냐민을 위한 그의 탄원은 담대하고 당당하며 비장했습니다. 생명을 건 탄원이었기 때문에 애굽의 총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나?
우리는 유다의 변론을 들으면서 새삼 유다를 다시 보게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 유다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죄 없는 동생 요셉을 팔아버린 후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에게 가서 살았습니다. 가나안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 아내와 아들들이 차례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며느리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다가 어떻게 이런 일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되었을까요?
그러나 유다는 믿음이 회복되고 영적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언제부터 유다가 영적으로 회복되었을까요? 며느리 다말이 청녀로 변장하여 자기를 속이고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유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고 계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유다는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생활을 청산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믿음을 온전히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에 유다는 애굽의 총리에게 담대하게 탄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는 또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전에는 아버지에게 슬픔을 끼쳤으나, 이제는 아버지의 슬픔에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팔아버렸지만, 이제는 베냐민을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위해 자신이 대신 희생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생명을 걸었기 때문에 유다는 담대하고 감동적인 변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변화된 유다의 모습은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유다와 함께 하심으로 유다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히7:14상) 요한은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5:5)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주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4)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사랑하며 기도하자.
유다는 지금 베냐민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모습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이 말씀은 요한복음 3:16과 짝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왜 그렇게 무력합니까? 도대체 나의 사랑으로 어려움을 당한 형제가 실제로 도움을 받고 있습니까? 자신의 희생이 없는 사랑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중보기도가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생명을 걸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민족과 형제의 죄를 자기의 죄인 것처럼 애통하고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 역시 열조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놓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생명을 바쳐 사랑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서 어떻게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입술의 구호로만 그치는 사랑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중보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위해, 교회와 민족을 위해 내 생명까지라도 대신 내놓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없이는 중보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오늘 생명을 걸고 사랑하며, 형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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