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를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이나 열매를 구했지만 얻지 못하자, 화가 난 주인은 과원지기를 불러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자기가 한 해 동안 부지런히 가꾸어 볼 테니 그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버리라고 애원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은 하나님을,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시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어디에다 심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 6절을 다시 읽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한글성경에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a fig tree planted in his vinyard’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도원주인이 오직 ‘한 그루’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강해서 아무 곳에서나 잘 자랍니다. 그런데 왜 이 주인은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을까요? 그 한 그루를 특별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종을 시켜서 심지 않고 자신이 직접 심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나라 가운데서 아주 적은 나라인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많은 나라들 가운데 오직 한 나라 즉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까? 그들이 다른 민족보다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지혜로운 민족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당시 가장 강하고 큰 민족이었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사랑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선택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무슨 조건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 감격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주인이 포도원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심은 후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6절 후반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와서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주인은 비록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심고 때가 이르자 직접 와서 열매를 구했습니다. 주인은 얼마든지 종을 통하여 열매를 맺었는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와서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구했습니다. 왜 과수원 주인이 직접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구했을까요? 그가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관상용이 아니라 열매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포도원주인이 자신의 포도원에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도 없고, 향기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심는 것은 오직 열매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아주 많이 열매를 맺습니다. 1년에 세 차례나 수확할 수 있는데, 1년 열두 달 중 4~5월에만 열매가 없고 10개월 동안은 언제나 열매가 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는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7절을 읽겠습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주인은 매우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라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하나를 찍어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면서 덧붙인 말이 좀 이상합니다.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나무는 한 그루에 불과했습니다.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포도원에 비하면 지극히 작습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차지하는 면적은 한 평도 안 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하더라도 버리는 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왜 포도원주인은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고 말했을까요? 그것은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원했는데, 하나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해 화가 치밀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분노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에 심겨진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입니다. 어쩌다가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무인 이스라엘백성에게 바라셨던 열매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인 것을 부인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온갖 불법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예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 66권 모두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짜 구원자로 고백하고 구원자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돈을 숭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물질 앞에 무릎 꿇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이정미 헌법 재판관이 퇴임식 인사에서 한 말이 동영상을 통하여 널리 번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 동영상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늘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해 늘 기도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가 어떻게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해 늘 기도하겠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세상의 권세와 명예가 구원자가 아니라 예수께서 구원자이심을 진정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맺는 삶을 살아가는 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용기와 담대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둘째로, 우리가 즉시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라며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자 과원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8-9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과원지가 한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7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은 3년이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과원지기는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고 했습니다. 주인과 과원지기의 대화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해서 3년 전에 베임을 당해야 했는데 지금까지도 찍어버리지 않은 것은 과수원지기의 간청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즉시 심판하시려고 하시지만 지금까지도 유보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간청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금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담대히 죄를 범하고 있지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간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실 때의 모습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예수께서 하나님께 간청하시는 모습이 애처롭게 여겨졌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때에 어떤 자세로 하셨을까요? 그냥 앉아 계신 채로 간구하실까요? 보좌에서 내려와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야 하실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저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저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욕을 당하신다고 생각하니 죄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울음이 폭발했습니다.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주님, 제가 알고 짓는 죄를 인해서는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지 않겠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비유를 잘 읽어보십시오. 과원지기가 포도원주인에게 간정했지만 주인의 확답이 없이 비유가 끝을 맺고 있습니다.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럻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9절). 여러분이 읽어서 알다시피 성경은 과원지기의 간청 이후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었는지 아니면 열매를 맺지 못하여 찍어버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그토록 설득했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자, 주인이 말한 대로 70년경 로마의 디도장군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게 하셨고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정하신 때에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심판의 때가 있음을 알고 속히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면서 마지막 심판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므로 주님 오실 때에 책망이 아니라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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