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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2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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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37354 |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성령강림후 셋째 주일, 2017년 6월25일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기독교와 로마 제국
지구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그 차이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지구에서 숨을 쉬고 뭔가를 섭취하고 배설하고 후손을 번식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다른 동물과 다를 게 없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와 가장 가까웠던 인류 조상은 네안데르탈인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보다 체격이 더 크고 뇌 용량도 더 컸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아시아와 유럽에 펴져서 살았는데, 3-5만 년 전에 멸종되었습니다. 그들의 멸종 원인은 지구 빙하 현상이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거주지를 따뜻한 곳으로 옮긴 탓인지 모르지만 빙하기에도 살아남았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마저 멸종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 우리의 무의식에도 빙하기를 비롯한 각종의 재난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이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해도 소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호모 사피엔스 후예인 현생 인류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문명 활동이 그런 노력입니다. 빙하기가 와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집도 짓고, 난방 시스템도 갖추었습니다. 경제 발전도 끝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은 아주 높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2만7천 달러를 상회합니다. 가족이 두 사람이면 낮춰 잡아 우리나라 돈으로 5천만 원, 4명 가족은 1억 원입니다. 빈부격차가 유난히 커서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여유가 있습니다. 이런 정도의 경제 수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강력한 욕구는 소멸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면 해명이 안 됩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이런 욕구를 제도화 하는 게 국가입니다. 그것의 정점은 제국입니다. 제국의 이념은 주변의 작은 나라를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고급한 문명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 제국의 힘은 주변 나라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해결해보려는 욕망이 다시 다른 이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이 인류 역사입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의 가장 강력한 제국은 로마였습니다. 로마는 당근과 채찍으로 지중해 인근의 여러 민족과 나라를 지배했습니다. 로마 군대는 지금의 미국 군대 못지않게 강력했습니다. 로마법과 정치제도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반역자들을 합법적으로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일벌백계의 사형제도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삼족을 멸하는 방식입니다. 로마 시대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제자들은 제 정신이 아닌 이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킨 로마 제국과의 대립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맞서 싸울만한 힘이 기독교에는 없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당한 순교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사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설교 본문인 마 10:24-33절은 초기 기독교의 이런 형편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미 그 앞 구절인 마 10:16-18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할 어려움을 크게 염려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은 자신들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대상을 박해합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이익을 주기도 하고, 마녀 사냥하듯이 모함을 씌우기도 하고, 블랙리스트 만들고, 회유하기도 하며, 직접적으로 신체적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 2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사람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이유의 하나는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받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복음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이 자기들 스스로에게서도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당시에 누가 인정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지 못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도 여전히 세상은 악하고, 비열하고, 영악합니다. 메시아가 와서 세상이 달라졌다는 근거를 찾기 힘듭니다. 예수 이전과 이후에 세상은 변하지 않았으니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들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습니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볼 때도 하나님이 굳이 30대 초반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유대인 남자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긴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니까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구원하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의 십자가이어야만 할까요? 이것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26절 본문은 숨어있는 것이 결국은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숨어 있습니다. 종말이 되면 그게 다 드러날 것입니다. 종말까지 우리는 그 십자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근거들을 계속 찾고 변증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를 통한 구원의 비밀은 은폐의 방식으로 지금 이미 드러났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서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 해방의 능력을 통해서 그들은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정치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제자들의 신앙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으십니까? 아닙니까?
2) 다음은 28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세상 권력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몸과 영혼은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몸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삶을 가리킨다면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삶입니다. 몸의 속성은 사회적인 신분이 높아지거나 건강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건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악한 권력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들이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존재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두 가족이 있다고 합시다. 두 쪽 모두 똑같이 연봉이 5천만 원입니다. 한쪽은 그 돈이 너무 적다고 불평불만이 떠나지 않지만 다른 한 가족은 그것으로 넉넉하다고 행복해 합니다. 연봉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삶의 능력은 영혼에 속합니다. 세상 권력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지 못합니다. 아주 일반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몸을 죽일 수 있는 권력 앞에서 우리의 영혼도 주눅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신앙이 필요합니다. 그런 신앙으로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만 두려움이 극복됩니다.
마틴 루터는 1521년 4월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호출 당했습니다. 당시 황제가 개최한 종교재판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석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는 참석해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루터는 책에서 주장한 내용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고 4월18일 황제와 추기경과 영주들 앞에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목숨을 건 주장이었습니다. 그가 종교재판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종교적 영웅들에게만 가능하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가능할 거 같지 않습니다. 물론 수준에서는 차이가 나겠지만 우리도 모두 작은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대상을, 즉 하나님을 경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 6:1절 이하에 따르면 이사야는 성전에서 천사들이 다음과 같이 노래하는 걸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누미노제’의 경험, 즉 거룩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경험도 낯설게 느껴질 겁니다.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경험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예배에 처음 참석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예배 순서도 다르고 사람들도 모릅니다. 아주 진지한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 우리를 그는 볼 겁니다. 아주 낯선 느낌입니다. 이럴 때 자신도 모르게 거룩한 것을 경험합니다. 대개는 삶이 상투성에 떨어져서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경험은 이런 상투성에서 벗어나 생명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세상살이에서 받는 몸의 불이익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경험이 그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3) 31절에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참새 이야기와 함께 나옵니다. 싼값에 팔리는 참새도 하나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참새들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릴 정도로 그들을 돌보신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의 뿌리는 대개 자기 안위에 대한 걱정입니다. 자기 염려, 자기 연민입니다. 21세기 문명은 이런 걱정과 두려움을 더 자극시킵니다. 티브이 광고도 이런 걱정과 두려움을 심리적으로 이용합니다. 그 화장품을 쓰지 않으면 늙어 보일 것처럼 자극합니다. 의학기술이 발전한 거는 좋지만 이로 인해서 자기 건강을 점점 더 걱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으면 뒤쳐질까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가장 완벽한 인생살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 자체를 소진해버립니다.
지난 화요일에 저는 대구 씨비에스 방송국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7,8개 항목의 질문을 받고 대답했습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 피디와 아나운서에게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대접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피디가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목회를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는 겁니다. 목회의 애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달라는 우리 교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제가 그렇게 말한 거 같습니다. 목사들도 걱정보따리를 지고 다닙니다.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회 성장을 달성시킴으로써 인정받으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게 가중되면서 자기 염려에 떨어지고, 더 나가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겉으로야 모든 걸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안위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지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어떻게 우리는 자기에 대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더 뿌리를 찾아올라가서,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 앞에서 겪었던 멸종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그리고 실제적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지금 사람들이 무엇에 심취해있는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티브이 통속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은 두려움을 잊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거기에 매달립니다. 저의 경우는 테니스 운동입니다. 운동하는 순간만은 모든 걸 잊습니다. 다른 취미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고흐 작품 전시회에 다닐 수도 있고, 여행을 다닐 수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일시적입니다. 24시간 테니스만 할 수는 없습니다. 좀더 자극적인 걸 기대하는 사람은 술을 찾습니다. 더 자극적인 것은 마약입니다. 사실 마약도 필요하긴 합니다. 극한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마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술과 마약에 빠져 있는 순간만은 두려움도 없고 자기에 대한 염려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삶을 훼손시키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최선의 길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생명 창조자이고 지금도 생명을 유지하는 분이고 종말에 완성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 경험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을 우리의 일상에서 찾으면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습니다. 그 아기는 어머니와의 관계만 유지되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으니까 실제의 어머니 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영혼의 어머니 품으로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느낌, 인식, 의지, 믿음이 바로 하나님 경험입니다. 그런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기는 하되 철없는 아이처럼 뭔가를 조르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긴 어린아이의 궁극적인 경험은 안식, 즉 참된 쉼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안식의 토대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안식이 무엇인지를 느낍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수고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안식으로 받아들이면서,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갈 순간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저는 오늘 다시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몸은 죽이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과 그런 세력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지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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