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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04 추천 수 0 2017.08.04 23: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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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3:24-30, 36-4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39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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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마 13:24-30, 36-43,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2017년 7월23일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가라지 비유 이야기


비유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자주 사용한 방식입니다. 복음서에는 나오는 수많은 비유의 주제는 대부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를 오늘 우리는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이 한해 농사의 결과에 따라서 결정되던 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씨를 뿌릴 때의 심정은 마치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거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밤중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합니다. 웬만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곡식이 자라면서 가라지도 자랐습니다. 이걸 본 일꾼들이 주인에게 ‘우리는 분명히 좋은 씨를 뿌렸는데 이 가라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주인은 ‘원수들이 그렇게 했나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일꾼들은 주인에게 다시 ‘가라지를 뽑아낼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가라지가 함께 자라면 곡식은 어려움을 많이 당합니다.

 

시골에서 텃밭을 하는 분들은 그 심정을 알 겁니다. 요즘 우리 집 마당에도 풀들이 살판났다는 듯이 잘 자랍니다. 집사람과 저는 시간이 날 때 호미를 들고 마당에 나가서 잔디 외의 풀을 캐냅니다. 잔디나 잡풀 모두 똑같은 풀이지만 우리 눈에 잡풀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더 이상한 것은 잔디가 꽃밭을 침범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풀을 원수 대하듯이 뽑아내면서 귀엽게 여긴 잔디가 꽃밭을 침범한 경우에는 우리의 원수가 됩니다. 당장 뽑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가라지를 그냥 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는 곡식의 뿌리보다 더 깊고 넓습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가라지만 솎아낸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모습니다. 가라지의 처리는 추수 때로 미루어졌습니다. 주인은 일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주인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꼴도 보기 싫어해야 마땅한 가라지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합니다. 한번은 29절에서 자칫 곡식까지 뽑힐지 모르니까 그냥 두라고 했고, 다른 한번은 30절에서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또는 어떤 종교적인 감동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실존이 담겨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인 마 13:36-43절은 전반부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이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이고 추수 때는 세상 끝이며 추수 꾼은 천사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의 설명을 알레고리라고 합니다. 고대 기독교 집필자들은 성경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걸 즐겨했습니다. 그런 전통은 중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알레고리 해석방식이 현대 학문의 관점에서는 미숙하지만 근본을 정확하게 통찰했다는 점에서 크게 공헌하고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 대한 해석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결론 부분이 중요합니다. 43절은 이렇습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해와 같이 빛나게 될 의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종말 신앙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때는 종말입니다. 오늘 비유에서는 추수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불에 사르게 될 것이고, 곡식은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갑니다. 종말에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거나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간다는 말이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허하게 들립니다. 그런 내용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기도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종말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기도 합니다. 기독교 영성은 종말을 얼마나 실감하느냐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종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토대는 예수의 재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써 세상이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계 22:20절은 그런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신약성경의 다른 것도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은 종말 신앙이라는 특징이 유달리 강합니다.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서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계 1:8)라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계 1:4)라고 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다 종말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여기 배낭 여행객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산티아고 순례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한 사람은 지금 당장 편하고 즐겁고 매력적인 것만을 좇아갑니다. 노래방에도 가고, 주점에도 들리고, 싸움판을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재미가 없으면 짜증을 내고 힘들면 옆 사람에게 화풀이도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순례의 목적지를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을 거쳐서 포르투갈까지의 전체 과정을 거쳐서 도달하게 될 그 목적지에서 경험할 희열을 영혼 가득히 채운 사람입니다. 그 목적지에서 그는 자신이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공연한 것에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걷는 게 지루해도 지루한 줄 모릅니다. 힘이 들어도 옆 사람에게 짜증 내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갑니다. 기독교의 종말 신앙은 바로 두 번째 사람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으로 이루실 생명 완성의 미래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입니다.

 

종말 신앙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지금 여기서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이 현실은 종말 신앙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되지 않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옳은 질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현실 감각이 턱없이 떨어져서 하늘만 쳐다보고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현실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현실은 오늘 우리 시대보다 더 혹독했습니다. 주변에 함께 살아가기가 도저히 불가능한 세력이 많았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이었습니다. 오늘 비유는 그것을 가라지라고 표현했습니다. 가라지는 당장 뽑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곡식까지 헤칠까 염려해서 그냥 두라고 말했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실존이자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전능한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 같은 이 현실을 곤혹스러워합니다. 악마의 장난이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했다는 사실도 그런 일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당시 제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억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이런 사태를 방관하셨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정의로우시고 전능하다면 이런 불의한 일은 일어날 수 없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는 늘 이런 방식으로 흘러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과 역사를 그러려니 하고 바라보거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얼마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여기에 예외가 아닙니다. 일종의 패배주의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극단으로 떨어집니다. 하나는 광신적 미래주의입니다. 해와 같이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만 광신적으로 몰두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컨대 신천지라는 종파는 계 14:1절에 나오는 144,000명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자신들 종파에 들어온 사람들로 간주합니다. 그것만이 신앙생활의 목표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역사가 실종됩니다. 이런 현상은 정통 교회 신앙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현실 변혁의 에너지가 그들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반대로 종말 신앙의 실종입니다. 하나님의 창고에 곡식이 들어간다거나 해와 같이 빛난다거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태도로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종말 신앙은 현실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배격하고 이 세상의 권력 의지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더 많은 기독교인들은 중간의 적당한 곳에 자리하고 있을 겁니다.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영혼은 이런 양 극단으로 치우지지 말고 종말 신앙과 오늘의 현실을 하나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도 그것을 가리킵니다. 우선 가라지가 없는 세상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가라지와 곡식의 구분이 그렇게 분명한 것도 아닙니다. 가라지와 곡식은 비슷해보여서 구별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가라지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일들은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곡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라지였습니다. 겉모양은 기독교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적이 많았습니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기독교인> 단체가 그랬고, 오늘 한국 기독교도 그렇지 않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가라지 비유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 ‘당신은 가라지야.’ 하고 비판하기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가라지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추수 때까지 참아주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둬야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한 인격체 안에도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에게도 가라지가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우리 안의 가라지를 일일이 다 솎아내신다는 우리는 견뎌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격 자체가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행스럽게도 가라지가 여전히 많은 우리를 추수 때까지, 즉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냥 보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안의 가라지는 다 하나님의 불에 태워질 겁니다. 이것도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도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가라지가 곡식을 헤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라지가 있다 해서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지도 말 것이며, 그렇다고 그런 상황을 안일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매 순간 거룩한 긴장감을 치열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거룩한 긴장감


거룩한 긴장감이라는 표현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인이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하지 않으면 신앙은 나태해지고 삶은 매너리즘에 떨어집니다. 표면적으로 역동성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을 조금이라도 깊이 성찰하는 분들은 그게 눈에 보일 겁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삶의 역동성이라는 게 결국은 성취감에 머뭅니다. 뭔가를 성취하면 그 순간에만 역동적이고, 조금 지나면 다 시시해집니다. 그래서 더 큰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계획하고 모의하고 투쟁합니다. 그걸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의 깊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종말과 오늘 사이의 인생살이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전체 인생이 거룩한 역동성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요?


오늘 가라지 비유에서 그 답을 찾을 있습니다. 가라지를 본 일꾼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버리자고 했을 때 주인은 그냥 내버려두라고 했습니다. 일꾼들은 주인의 깊은 뜻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과 역사에서, 그리고 개인의 실존에서 확인되는 가라지와 비슷한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불안하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의 그 모든 생각과 판단을 뛰어넘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아쉬움과 격정까지 모든 것을 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자유에 속합니다. 그 자유로 인해서 생명이 완성될 종말은 열려 있습니다.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통치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건 우리가 세상의 원리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행복한 삶의 조건인지를 안다고 확신합니다. 그게 정말 옳은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렴풋이 그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행복한 조건을 잃었기에 더 행복하다는 말에 동의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팔복에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았으니 예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자유를 인정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유를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폭군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능력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얼마나 미숙한지를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10년 전에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30년 전에는 어땠습니까? 이렇게 30년이 세월이 흘렀고,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시 30년이, 그리고 100년이 흐를 겁니다. 우리는 종말과 오늘 사이에서 삶을 버텨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곡식과 가라지가 뒤섞인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좌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실 자유롭고 정의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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