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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후3: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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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홍전 목사 |
참고 : | 성약교회 |
성경: 딤후3:15-17절
제목: 바울의 최후와 성경
바울 선생은 제3차 선교 여행을 유럽에서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여러 번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가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 줄 확신하고 그 앞길에 놓인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로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때 이방 여러 교회에서 거둔 많은 연보를 가지고 갔습니다(행 24:27). 바울 사도는 유대 신자들의 비참한 육신 생활을 잘 알았으므로 이방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표로 모은 연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돈을 친히 갖고 예루살렘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매를 실지로 증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오만한 율법주의, 그 그릇된 사상을 고쳐도 주고 교회의 사랑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무튼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주의 뜻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피할 수도 있었으나 자진하여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행 21:13,14,17). 마침내 성전에 들어갔을 때 바울은 거기서 폭도들을 만났습니다. 이 폭도들 때문에 불가부득이 당시 팔레스틴의 로마 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 항구의 총독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거기서 있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사도는 가이사에게 상고를 한다고 해서 결국 가이사의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 이야기올시다.
바울 선생은 로마의 옥에서 재판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복음 사역을 계속하였고 그 후 2년 동안 자기의 셋집에서 지키는 군사와 함께 살면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등 서신들을 썼습니다. 그 후 소식은 A.D. 63년 혹은 64년에 바울 선생이 사면이 되어 옥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헬라 땅과 소아시아 땅을 순회하였고, 그 동안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다시 잡히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마 관원에게 붙들렸습니다. 죄목도 유대교의 율법 문제가 아니라 그때 로마의 폭군 네로의 저 유명한 로마시 방화 사건의 범인 중 하나로 붙잡혀 로마의 옥중에서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미친 짓을 하던 네로가 ‘로마시를 깨끗하게 새로 건설하겠다’고 제가 불을 질러 놓고 민심이 오오하니까 나중에는 ‘기독교인이 불질렀다’는 식으로 전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인은 이편저편한테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네로 측에서는 ‘민중의 적이니까 가만둘 수가 없다’ 하고 기독교인을 잡아들이게 하고, 일반 민중은 ‘불 지른 원흉들이니까 안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큰 박해를 받게 된 것을 다 잘 아실 것이올시다. 이렇게 해서 바울 선생도 붙들려서 다시 로마로 압송이 되어 옥에 갇힌 것입니다. 이제는 뭐 다른 사건도 아니고 기독교인의 수괴의 하나인 까닭에 거기서 순교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마지막으로 편지를 쓴 것이 이 디모데후서올시다. 전에 로마 옥에 있던 때가 대체로 주후 63년이나 될 터인데 한 3년 후에 그러니까 66년이나 67년에 이 마지막 순교를 기다리는 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있으면서 디모데후서를 썼는데 이 3장에 들어가면 맨 먼저 1절부터 5절까지가 마지막 날에 혹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는 것입니다. ‘큰 배교와 동시에 대환난이 있다’는 이야기는 디모데한테 전에 한 편지에도 썼지만(딤전 4장) 바울은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이때에 쓴 편지에도 ‘말세에 크게 고통하는 날이 온다’는 것을 다시 썼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이유를 쓴 것을 보면 무슨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고 혹은 문화상 어떤 문제도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들의 부도덕한 심정들 때문에 특별히 고통스럽다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도 고통이고 또 신체가 약해도 고통스럽지만, 그것보다도 한 사회가 다 같이 큰 고통에 들어가는 것은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정의 악’ 때문입니다. 심정이 악해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자기를 ‘내로라’ 하고 뽐내고 남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그리고 사나워서 남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없어서 고통스러운 것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람 사람끼리의 관계가 괴악하게 되는 것이…….
말세에 고통이 온다 하는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했는데, 12절을 볼 것 같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히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 거룩한 법도를 지키고 살아가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두고 “잘합니다. 잘해 보십시오” 하는 게 아니라 어쩐 연고인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말이오. 말세에 고통하는 때 사람들의 심정이 이 3장 모두(冒頭)에 묘사한 것 같은 심정인 까닭에 다른 일반 이웃들에게 고통을 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도대로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괴롭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이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거짓말하는 자, 그 원흉은 물론 사탄이오. 사탄의 특색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으로 나타나는데 사탄이 스스로 변하여 광명한 천사인 체한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속이는 것들이 세상에 있어 가지고 이론으로 속이고, 종교로 속이고 또 도덕으로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재의 사회 현상을 바라볼 때, 특별히 앞으로 올 세대를 생각해 가면서 사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 어떻게 생각들을 하는가, 하는 것들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괴상한 여러 가지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다’ ‘부도덕하다’ ‘옳지 않다’ 하던 것들도 지금은 당당하게 ‘사람이니까, 인간성이 있으니까’ 하는 말로 변호를 하고,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같이 해석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하고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서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그러고, 서로 안됐다 하지만 거기에는 생각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보고 안됐다고 하면 세대 차이라고, 세대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안된 게 아니라고 하는 피할 길들이 다 있습니다. 요컨대 그 ‘도덕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 다 뒤집혀 가지고 있는 그런 세대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에 큰 기대를 하는 이들이 있지마는 21세기는 그런 일이 아주 더 현저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런 일이 현저해질 것 같으면 그만큼 사람 살기가 고통스럽고 어려워진다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데가 15절부터인데 바울 선생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았지?” 하면서 ‘성경이 무엇이다’ 하는 것을 요약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15절에 한 가지 요약해서 말하고 16절, 17절에 계속해서 또 성경이 소용 닿는 것, 성경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가,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15절에 있는 말씀대로 볼 것 같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얻는 지혜가 있게 한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16절로 들어가서는 “모든 성경은 그 근원이 어디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므로 성신께서 역사하신다” 그것입니다. 성신의 역사로, 그 거룩한 영감에 의해서 나타난 성경은 “곧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교훈 하는 것도 있고, 잘못을 책망하고 고치라고 하는 것도 있고, 또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하는 것들을 죽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고통스러운 시대에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또 모든 선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또 하였습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성경은 여러 가지 교훈을 합니다. 그런데 그 교훈은 받는 사람의 신앙이 장성하는 생명의 양식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 그냥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말면, 그게 안 듣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성경이 바라는 바 그 용을 충분히 못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내가 듣고서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내 영혼의 기능이 반응을 일으켜서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닫고, 알아야 할 것은 알고, 느껴야 할 건 느끼고, 결정해서 해야 할 일은 함으로써 구원의 신앙의 실질상 용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그대로 한 지식의 내용으로만 머문다면 지식으로야 언제든지 경전이 거기에 있으니까 사람들이 가서 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지식의 내용으로 남는 소용이 아니라, 교훈이나 책망이나 바르게 함이나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게 작용한 실질이 나타나야 할 것이라 말씀입니다. 그렇게 유익한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묵상하고 성신께 구해야 합니다. 성신께서 역사해 주시사 그 거룩한 비췸이 우리를 깨우쳐 주심으로써 구원의 신앙의 소용이라는 것이 바르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라 할 때 구원이라는 말은 종합적인 용어입니다. 그 ‘구원’의 내용에는 ‘영생’의 관한 가르침도 있고, ‘믿음’에 대한 가르침도 있고, ‘회개’와 ‘거룩한 생활’,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영광으로 화하는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은혜로운 사실들이 거기에 순서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잘 임하여 바로 연결이 되는 것이 참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올시다. 성경을 보고 깨닫고 성신의 인도를 받으면 그 지혜를 바로 알게 된다 그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지혜라는 말을 한 인격자를 향해서도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또 잠언에서는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9:1) 해서 지혜를 비유로도 썼습니다. 그런데 지혜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하고는 좀 다른 말이올시다. 지혜가 지식의 하나는 하나인데 그것은 어떤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치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구원을 얻는 지혜’라 할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에 이르는 가장 거룩한 방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도 안에서 신자가 장성해 가면서 거룩한 여러 가지 은혜의 내용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 가지 내용의 구원의 차서인데 가령 중생이 있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그 다음에는 회개를 하고, 믿고 의지하고 나가는 생활,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다음에 나타나는 거룩한 생활 즉 성화의 생활을 한다는 것, 또 양자가 됐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신다는 것, 또 영광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입으신 몸과 같은 영광의 몸을 우리가 다 같이 입게 될 것이라는 것 등 여러 가지 내용이 바로 구원을 얻는 지혜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바 거룩한 은혜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은혜의 내용을 시대가 험하든지 평탄하든지, 고통과 환난이 있든지 순조롭든지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우리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선생도 순교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며칠 후 자기에게 돌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신앙의 동지요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러한 내용을 마지막 편지로 써서 보낸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 환경이 조용하든지 시끄럽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고 또 배워 가야 할 것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서 확호하게 서서 나가려면,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거룩한 교회로서 자기의 광망(光芒)을 비추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인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또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법도를 즐거워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귀만 가지고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시간과 정력을 써서 간곡하게 알아보고 생각하면서 배워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우리 안에서 차츰차츰 빛을 비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전해 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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