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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마태복음 김홍전 목사............... 조회 수 560 추천 수 0 2017.08.06 00:5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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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13-16 
설교자 : 김홍전 목사 
참고 : 성약교회 

성경: 마5:13-16절/눅14:15-35절
제목: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에서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실 때 너희는 누구냐 하면 분명히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그 행복은 이것이라고 지금 가르치고 계신 대상들입니다. 그 대상들은 오늘날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사람들, 교회”를 말합니다. 흔히 세상에 소금이 될 수 없는 사람, 실질적으로 소금으로서 존재론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많은 무리를 보시고 하나님 나라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결국 그 많은 무리 속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지만 그것을 건설하는 데에 전초적인 혹은 초석을 놓는 임무를 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의 행복은 이러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것이라고 가르치셔서 그들로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어떤 일정한 소수의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가르치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세계 위에 건설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경영과 계획 가운데서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역군으로서 이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운 다음에는 마음이 가난하다든지 애통하다든지 온유하다든지 의를 사모한다든지 하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참된 모습이 적극적으로 나타나서 남에게 자비를 베풀고 일편담심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청결함이 있고 또한 그가 다른 사람에게 항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인 화평을 소개하고 전달하고, 그렇게 해서 이 세상과 맞지 아니하는 까닭에 세상의 핍박을 받더라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세상에 핍박 가운데서라도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속성을 능력 있게 증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결국 이 세상에 대해서 무슨 임무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즉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대해서 소금으로 나타날 것이고 빛과 같이 비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우매해서 어떤 사람을 쓸 만하겠다고 데려다 놓고 정력을 기울여서 가르쳐도 되다 못 되어서 들 포도를 맺고 비뚤어지는 수가 있지만, 완전하신 예수님은 사람의 장래를 아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까닭에 경영하시는 그 일은 그 목적이 어떠한 방향으로든지 원하시는 그대로 성립됩니다. 이런 까닭에 친히 사람을 선택하시고 “너희는 이러이러한 행복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것을 먼저 말씀하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세상에 소금이 될 수 없는 사람, 빛이 될 수 없는 사람, 즉 그런 의무를 감당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사람을 꼭 선택해 놓으시고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소금이라는 의미


소금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결정체니까 소금과 같다는 말이 아니고 소금이 독특한 자기의 특성으로 짠맛을 가지고 있는 점을 들어서 너희도 너희대로의 특성적이 맛, 하나님 나라의 분자로서 자기 자신의 독특한 특성을 늘 가지고 있으라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소금이 용해된다는 성질을 들어서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하는 점에 소금의 의미가 있다고 말을 하기가 쉽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희생과 봉사를 전제로 이야기하신 것보다 소금의 어떤 속성을 가지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소금 맛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셔서 소금의 맛을 가지고 무슨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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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의 전체적인 요지


세상에서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경계에 속해 있는 “너희”가 그러한 세상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성격과 능력을 받고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핍박을 받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의 강한 영향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끼치는 일이다. 그것은 소금 노릇을 하고 빛 노릇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영광의 특성을 보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천국적인 신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이 지상에서 소금 노릇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가 지금 높은 산에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행복에 대해서 의논을 하지만 이제는 다시 내려와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한 아무런 경향도 없이 이리저리 방향 없이 돌아다니며 헤매고 있는 중생 속에 들어가서 소금 노릇을 하고 빛 노릇을 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늘 거듭난 자에게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인 목표, 사회적인 실용성 문제를 소금과 빛이라는 말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를 참으로 진실히 믿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많은 은혜를 마음으로 받아서 하나님 나라의 의나 평강이나 기쁨을 가진 사람은 이 땅, 즉 지구의 표면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또 세계가 축조해 놓고 자랑하는 그 거대하고 화려하다고 하는 것과 훌륭하다고 하는 것과 또한 거기 있는 큰 세력과 권위의 내용에 대해서 소금 혹은 빛으로서 분명한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저 혼자서 종교의 즐거움에 취해서 열락의 경계 가운데에 늘 들어가서 살고 세상에 있는 동안은 임시로 기다렸다가 다시 기도하고 명상하고 교통하는 가운데 황홀의 삼매경에 들어가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분명히 소유한 다음에는 세상에 내려가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인류 역사의 터에 발을 붙이고 그들과 함께 움직일 때에 소금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빛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그 존재 가치가 상실하는 것이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에서 “만일”이라는 말을 써서 가정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을 네가 보지 않았느냐? 그것은 소용이 없지 않더냐?’ 이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만일 맛을 잃는다고 하면 어디에 쓸 수 있겠느냐? 그것을 생각해 봐라’ 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서 나중에 버려지고 사람에게 밟히는 바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는 중요한 교훈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생각해 보십시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을 소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 맛을 잃었을 때에는 더 이상 소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독특한 맛은 소금으로 성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빠졌는데도 소금의 결정체가 좋다고 그걸 보존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물론 소금의 맛만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의미는 “맛으로 대표되는 소금의 특성적인 것을 잃어버린다고 하자. 그러면 어디다 쓰겠느냐” 하는 말씀으로 쓰신 것입니다. 즉 “소금의 그 특성적인 것은 맛으로 대표되는데 맛을 잃지 않고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너희들도 그와 같은 작용을 땅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소금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작용은 어디에 맛을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소금이 모든 맛을 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단맛을 주려고 하는데 소금을 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신맛을 얻으려고 하는데 소금을 가져다가 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매운 맛을 요구하는 데에 소금을 칠 수 없는 것입니다. 혹은 사과나 바나나 이런 데서 얻는 어떤 독특한 향미를 얻으려고 할 때에도 소금을 쳐서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모든 맛을 주는 것도 아니고 모든 맛의 기본이 되는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소금이 맛을 잃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소금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점을 중요히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물론 무엇에다가 맛을 준다는 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싱거운데다가는 아마 맛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싱거운 데다 맛을 준다는 것도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짜게 먹으니까 자꾸 소금을 치지만 어떤 사람은 전연 짠맛이 없어야 좋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각각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맛있다고 하니까 그것도 어디에 표준을 두고 무엇이 맛있는 것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금은 무엇보다도 부패를 방지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내용은 부패를 방지한다고 할 때에도 소금이 부패한 것을 다시 싱싱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썩은 것을 싱싱하게 만들 재주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부패한 사회를 신선한 사회로 만들 책임을 가졌다”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패한 사회를 신선하게 만들 책임이나 능력이 없습니다. 부패한 사람들을 붙들어다가 신선한 사람으로 만들 능력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다면 그것은 외람된 생각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만이 홀로 하시는 일입니다. 타락한 사실을 바로잡아 놓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지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는 그런 가능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임무”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 중요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주어진 임무만 잘 감당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침범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패한 사람들을 신선한 사람으로 만들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은 예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합당한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되어갈 뿐입니다. 이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부패할 요소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부패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소금이 첫째로 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싱싱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당사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그의 속에 중요한 변개(중생)를 일으키셔서 회개케 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게 신앙을 주셨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자식으로 난 그 사람에게 다시 세상의 물이 들어오고 그릇된 것이 들어와서 그의 사상이나 정신이나 정서가 부패하고 타락한 데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그것을 못하게 막는 것은 너희들의 의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거기에 들어가서 동화하려면 녹아야만 하는데 그와 같이 우리도 희생하고 봉사해서 이것을 이루자 하는 식의 해석을 흔히 많이 듣게 되는데 이와 같이 “희생”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소금 노릇을 하라는 것은 소금으로서 거기서 일을 하라’는 이야기이지 녹아서 물이 되어 가지고 일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은 소금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맛을 가지고 있어야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봐야 할 문제는 “너희들이 부패를 방지함으로써 그에게 부패하지 아니한 사람이 받는바 더 나은 지혜를 그냥 유지케 하고 하나님과 은혜의 관계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하나님의 영광이 좀 더 발전하고 증시하게 기회를 마련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혹은 “땅위의” 소금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디의 소금이냐? 천상의 소금이라든지 혹은 다른 세계의 소금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러한 일을 해야 할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지상에서 그와 같은 영향을 끼쳐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의미를 ‘소금이 맛을 잃는 것같이 예수님을 믿는 너희들이 그 맛을 잃어 벌린다면 큰일이다. 즉 너희가 한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구원의 그 은혜를 상실해 버린다면 큰일이 아니냐? 그것을 상실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요지를 그렇게 해석하면 크게 잘못된 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구원을 받아서 잘 지내다가 자신의 잘못으로 자기가 받은 구원의 내용을 상실한다면 소용없다는 식의 해석이 나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생명은 영원하고 확실한 것이므로 그 생명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잘못하면 마치 소금이 맛을 잃는 것같이 잃어버리기도 한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히 보여 주시는 것은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 무의미하지 않느냐 하는 주장입니다. 너 하나뿐 아니라 ‘너희들’ 이라고 말씀하셔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사는 한 집단 혹은 집합체인 교회를 향해서 ‘이 거룩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땅 위에서의 독특한 성격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을 어디다 쓰겠느냐? 너희는 이 땅 위에서 교회다. 소금이다. 이 사회에서 부패를 방지해 나가는 중요한 임무가 있다. 그런데 너희가 만일 그러한 것을 할 만한 구원의 특이한 요소를 상실했다고 가정하면 그런 교회를 어디다 쓰겠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개인에게 있어서는 확증 있는 구원을 상실하는 일이 없을지라도 교회의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원상의 교회 혹은 신령한 교회가 있지만 동시에 보이는 교회들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의 사회적인 형태를 취하고 종교적인 교회 가운데에는 얼마든지 가짜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소금이라고 하면서도 반드시 행해야 할 소금의 임무를 상실해 버리고 딴 짓을 하고 세계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인 부패를 조장하는 일이 있다면 그거 어디에 소용 있겠느냐? 쓸데없어서 땅에 내던지면 사람이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짓밟힌다}는 것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라 발로 밟히는 것과 같이 수모와 모욕을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소금의 임무를 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대접하는 게 아니라 의미 없는 것이라고 발로 밟아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은 다 시시하고 소용이 없다. 거름 같은 것이다. 발로 밟아 버리자’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여기에 중요하게 나타난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절). ‘하나님 나라는 너희들 안에 있다. 그런데 너희들 안에 있는 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상실해 버렸을 때에는 사회의 부패를 방지할 무슨 기능이 있겠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 소금의 직분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소금의 직분을 통해 이 세상을 천국화하는 운동을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그런 이상 국가를 만드는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금의 직분을 이런 형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소금의 직분을 감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세계가 멸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망해서 마지막에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당장에 심판을 받지 않도록 그 기간을 미뤄 두는 일을 할 뿐입니다. 부패를 조금씩이라도 방지해 주는 것뿐입니다. 부패해서 결국 망하고 말 그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을 다 부르실 그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8) 하고 말씀하신 대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더 지혜가 있습니다. 세상일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지혜 있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지혜에 가담해서 무엇을 한다고 할 때에 과연 그 사람들을 지배하고 인도하고 나가느냐 하면 인도가 아니라 뒤따라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말 뒤에 타고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소금의 직분을 가지고 썩어 가는 것을 방지해야 할 텐데 본래의 사명은 어디다 두고 딴 데로 움직여 나아갈 때에는 교회로서의 특성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것이 아니고 구원의 복음을 확실하게 전파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분명히 전달해서 작은 수지만 하나라도 더 이 구원의 복음 가운데 들어와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자꾸 붙들고 나아가려고 할 때에 이러한 생활의 영향이 차츰 차츰 그 사회에 미쳐서 그 사회가 부패해서 한꺼번에 휩쓸려 나갈 때에 그릇된 방향을 수정하여 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에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금과 고모라가 망해 갈 때 의의 열사람이 존재했더라면 그 당장에 그렇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지 않고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 의인 열사람, 즉 부패를 방지하는 요소들이 거기에 없어서 썩은 생선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해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땅 위에 그 자체로 싱싱하게 서 있고 교회의 영향이 사회에 미쳐서 부패를 조금씩이라고 억제하고 방지해 나가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지 교회가 이 사회의 일에 참여해 가지고 그 뒤에 타고 한꺼번에 망하는 것을 뒤따라가는 데에 교회의 임무가 있을게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여기서 잘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주의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째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말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원의 은사를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든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특별한 보장을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충실한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이 말씀의 요지는 “한번 주신 그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로 존재할 때에는 소금이 맛을 잃는 것과 같이 교회 자체가 본질을 상실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을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하고 모아 놓지 않고 구원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이것이 기독교라고 하면서 모아 놓을 때에는 그런 일”이 생깁니다. 이러한 일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이렇습니다.  확실하게 중생이라는 사실에다가 중점을 두고 교회를 구성하지 않고 중생이라는 것을 곁들여서 한마디 하고 일반적으로는 종교 단체의 위대성이나 기독교의 발전의 중요한 요소라고 해서 들고 나서는 소위 기독교적인 문화나 기독교인적인 도덕이나 기독교적인 철학 운동이나 기독교적인 사회생활 운동에 교회의 특성을 두고 자꾸 모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그것은 거대한 사회를 구성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려고 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거대한 사회를 구성해서 다수의 힘을 빌려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려고 할 때에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으로서의 직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소금이라는 신국적인 성격에 의존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세력에 의지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를 키워서 많은 사람을 모아 가지고 그 많은 사람의 세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할 때에, 혹시는 많은 사람을 매개로 해서 그들을 통해서 신국적인 요소를 나타내려고 할 때는 좋은 일이지마는 그렇지 않고 많은 사람이 있는 까닭에, 많은 사람이 다 같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고백을 하고 모인 사람들이니까 나가서 이 큰 세력을 가지고 무엇을 하자고 할 때에는 그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세력이라고 하는 일종의 사회 세력, 일종의 정신 운동의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것을 소금의 직분이라고 가져다 붙이는 교묘한 생각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또 해야만 믿음이 있는 것같이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같이 인식합니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사람들이 겨우 생각하는 것이 이 정도의 인식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뒷전이고 항상 자기네들끼리 야단법석 할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그로 말미암음 성격, 즉 팔복에 묘사된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초래하는 기본적인 성격을 떠나서 종교적인 사회 세력에 의존하거나 또한 종교적인 인간의 열심과 정신적인 운동에다가 집중하거나 인도주의적인 봉사와 사회 개혁 운동에 주력하는 것은 결코 소금의 직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오늘날 기독교를 혼탁하게 해 가지고 그런 것에 중점을 두고 사회 복음 운동을 하고 나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 사회에 자기네 종교적인, 도덕적인, 정신적인 영향을 끼치고 나가겠다고 말들을 하지만 소금의 직분을 그런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소금의 직분은 어떻게 나타나는 가입니다.


6. 소금의 직분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소금의 직분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먼저 “구원의 복음이 확실히 전제되어서 중생했다는 확실한 사실이 그리스도적인 품성, 즉 신국적인 품성의 사실로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나타날 때에 자연히 소금의 직분”을 하는 것입니다. 사회 세력을 모아 가지고 운동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 세력을 모아서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사회 세력이라는 힘을 기독교의 성격으로, 소금이 가지고 있는 요소로 승인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회세력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은 사회 세력 여부와 관계가 없습니다.

가령 두 사람인 남편과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자기 집에서 내외간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기도해도 거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이고, 거기에서 그 사람들이 소금의 직분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창해와 같이 넓은 세상에서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아니고 두 사람의 세력이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느냐! 그래도 사람의 수가 많아야 보는 사람도 대단하다 할 것이고, 그리고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도 의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두 사람으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참으로 그릇된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적인 성격과 하나님 나라의 품성을 분명하게 고지하고 살면 그만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세력을 가지고 운동을 하고, 프로그램을 세우고, 방법론만 가지고 이것을 한다. 저것을 한다고 하면서 북을 치고 나팔을 떠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작정 무슨 주의, 무슨 운동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것 자체로 가지고 있는 성격이 강력한 까닭에 강력한 자기 성격을 나타내면 그만이지 거기다가 인간적인 종교 세력을 가미해서 다른 세력을 붙여 놓으면 그것 때문에 오해를 사고 차라리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증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단체의 성격을 증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심히 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금의 직분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인용해서 딴 짓을 자꾸 하는 일이 있는 까닭에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소금의 직분}이라는 것은 “소금이 자신의 특성을 짠맛으로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과 같이 너는 너대로 분명한 특성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특성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어와서 그로 말미암아 중생하고 변개해서 예수 그리스도적인 변개의 사실을 나타낼 때에 그리스도의 품성”이 발생합니다. 즉 “도적적인 성격”이 나타납니다.


이 {도덕적인 성격}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한다는 도덕이지 사람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한다는 윤리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덕적 성격인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분명히 드러나는 데서 먼저 소금의 특성”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 가운데 들어가면서 그것을 행해 나아갈 때에 필연적으로 하나님 나라적인 사명”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품성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벌써 사업”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와 오해해서는 안 될 문제가 여기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그 사람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업”인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서 하나님 자식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나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회사 하나도, 아무런 학교 하나도 설립하지 않고 아무런 기업 하나도 만들지 않고 아무런 글 한마디도 안 쓰고 말 한마디 안 했다고 가정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하나님 나라 본질”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가치를 갖습니다. 그것 자체가 벌써 “하나님 나라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짓는 큰 집이나 제도나 혹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종잇조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하다든지 또한 자기의 정의적인 생활에서 애통하다든지 또는 하나님만 순종하겠다는 온유”라는 이런 마음의 기본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것부터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무엇 하나도 ‘너희는 무엇을 크게 해야만 하겠다’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남에게 태도를 취할 때에는 긍휼이 나타나고 하나님께 태도를 취할 때에는 마음이 청결하고 해서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의 사회에서는 화평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로써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드러나고 그것이 이 세상에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느냐 하면 자기가 조작해서 무슨 운동을 하면서 나가는 일이 아니라 소금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부패해서 아주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될지라도 자기가 존재하면서 생활을 그렇게 할 때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바라보고 그 생활에서 자기네가 맛볼 수 없고 자기네가 해석할 수가 없는 특이한 것을 발견할 때에 가서 묻고 영향을 받고 하는 동안에 거기서 소금으로서 자기 임무를 행해 가는 것입니다. 쫓아다니면서 말하지 않더라도 그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으로써 자꾸 소금의 직분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직분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모습은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것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쓸어버리고 심판에 버려야 할 부패해 가는 사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구 발생하는 까닭에 아직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를 방지하고 이렇게 해서 부패한 자가 버림을 받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어떤 시기까지 지연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소금으로서의 직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님 나라의 성격을 분명히 간직하여 정당하게 보존하고 전파하여 그리스도의 평강과 화목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그냥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분위기만을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그냥 지내는 생활 형태로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세상에 대한 신자의 의무입니다.


7. 세상에 대한 신자의 의무


세상에 대한 신자의 의무는 세상에 가치에 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적극적으로 증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를 사모하고, 때론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결같은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인 화평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전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방법론만 가지고 따지고, 이론만 가지고 싸우고 그래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내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성격을 정당하게 알고 깨달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증거 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자기의 삶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그냥 예배드리면서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헌금도 한다고 해서 신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종교인으로서 살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굳은 마음으로 붙들어 그 은혜 가운데 확증시켜 주신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간직하도록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서 나중에 버려지고 사람에게 밟히는 바가 되는 것처럼 신자로서 의무를 저버리면 세상에 밟히는 바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참으로 바르게 믿는 신자들은 이 세상, 즉 인류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명의 영향력을 파괴력 있게 확대시켜 나가는 일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만큼 신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이 인류 사회에 대해서 항상 소금과 같이 자기 자체의 독특한 속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낼뿐더러 들어간 사회에서는 그 속성이 강한 영향을 미쳐서 부패를 방지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릇된 이론이나 그릇된 진리, 그릇된 사상들로 부패해 가는 교회나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속성으로 강하게 영향력을 미쳐 부패를 방지해 가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을 충분하게 간직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주님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맡겨 주신 십자가 즉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자기의 전부를 내어 맡기고 그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작자 되어야 합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는 흉내만 낸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선택받은 백성들에게 더 높은 신앙의 표준을 정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소금의 역할을 드러내는 일인 모습인 신자의 의무입니다. 신자의 의무는 제자로서 구비하야야 할 조건을 간직할 때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뤄 교회를 형성하고 세워가는 것같이 이 일은 신자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신앙고백을 통해 모임을 이룬 교회공동체가 감당할 때 더욱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신자뿐 아니라 교회도 소금 노릇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8. 교회의 소금 노릇


우리는 교회의 소금 노릇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이들 오해하고 있는 내용인데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심각한 교회부재현상을 낳게 됩니다.


교회가 자체로는 신령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날마다 울며 기도할는지 모르나 만일 고립되어 있어서 사회와 접촉해서 구체적인 작용을 하지 않고 설령 접촉할지라도 그냥 표면해 불과하지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고 접촉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소금 가마니에서 소금을 가져다가 시멘트 바닥이나 어디에 놓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차츰차츰 용해되어 가면서 자기 맛을 내기 마련인데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고 접촉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 궤짝에 소금을 담아 가만히 두면 나중에는 그 나무에도 염분이 배어들어 갑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일이 전연 없이 나무는 나무대로 있고 소금은 소금대로 있다고 가정한다면 요컨대 이와 같이 완전히 유리되고 고립된 상태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한 지체들이 신령하고 거룩한 생활을 한답시고 거기에 자기네만 좋다는 생각을 집어넣으면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고립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로서의 사명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가 정상적인 방향에서 이탈하여 나가면 강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교회가 방향을 잊어버리면 강하게 말을 하여 방향을 수정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에게 허락된 사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류 사회에서 소금이라고 할 때에는 소금의 작용을 하는 것이고 인류 사회의 접촉은 필연적으로 어떤 작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인류 사회에 거룩한 교회로 있으면서 교회의 여러 가지 속성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어서 거룩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아하고 아무리 떠들어도 인류 사회에 소금과 같이 적극적이고 구체적이고 결과 있는 작용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다시 생각할 문제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교회들이 교회로서 자체의 방향을 생각하고 결정하려고 할 때에 흔히 그릇된 생각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릇된 방향을 향해 세워진 교회가 영향을 미치고 참된 교회는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현상이 발생하였는가 하면 사회에 접촉할수록 죄를 짓고 거룩하지 못하고 더러워지고 부패하고 타락하니까 가급적 사회와 유리되어서 산속에 들어가서 수도원을 짓고 명상을 하거나 혹은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는 일을 하고 또한 고요히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를 반성하고 고행을 하고 또 근검하게 생활을 하는, 일종의 수도사적이고 은자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교회는 가장 거룩해지고 그것으로써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되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은 이러한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라 인식하는 것조차도 희미해진 것 같습니다. 교회가 소금 노릇의 색깔은 늘 한 가지여야 합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에 따라 오늘은 이 색깔, 내일은 저 색깔의 변화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소금의 맛이 한 가지의 맛을 가지고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것처럼 교회도 한 가지의 색깔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의 정치상 문제나 혹은 문화상 문제나 혹은 사회 전반적인 중요한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교회가 거기에 대해서 소금과 같은 짠맛을 드러내지 못하고 남이 달콤한 맛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것을 따라가고 남이 신맛을 이야기할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간다면 소금이 짰다가 달았다가 시었다가 혹은 매웠다가 하는 것이 되어서 소금으로서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금은 소금대로 자기의 독특한 짠맛을 늘 유지하고 있어서 어디 가든지 맛을 잃지 않고 작용해서 자기도 짤 뿐 아니라 접촉한 거기도 짜게 만들어 놓고 그로 말미암아 부패를 방지하는 데에 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나 지침을 요구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때에 교회의 많은 사람들, 특별히 자기의 방향을 결정하고 나가야 할 청년들이 이 세상의 사상가나 평론가의 여러 논평, 비판, 분석이나 지시에 따라서 움직이고 교회에 와서는 다만 종교적인 행사 몇 가지에 참석하는 데 그치고 ‘착한 사람이 되라. 열심히 예수 믿고 예배당에 잘 다니고 그 다음에 천국 가거라’ 하는 정도의 가르침에서 교회 활동의 큰 의미를 찾는다면 교회는 결코 소금 노릇을 잘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소금으로서 자기 의무}를 충분히 행하려면 무엇보다도 “교회 자체가 소금으로서의 성격을 강력하게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금 아닌 다른 것으로 존재할 때에는, 예를 들어 결정체의 모양은 비슷해도 설탕으로 존재한다면 단맛을 내는 설탕은 될지언정 짠맛을 내는 소금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이는 교회의 조직 체계가 교회답게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 소금의 본무가 있는 게 아닙니다. 마치 소금과 같은 결정체를 취하고 있는 것이 설탕도 있고 그 이외에 비료도 있을 수 있는 것처럼 교회와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형태를 취하고 교회의 형식을 취하면 다 교회인가? 아무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은 교회로서의 짠맛, 교회로서의 독특한 속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단지 어떤 형태를 갖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 전체의 목적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9.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세속화와 사회 참여와 관련된 일임


교회가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서 진정한 소금 노릇을 하겠는가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에 대한 바른 해석과 생각은 적고 그저 후닥닥 이 세상에서 빛 노릇을 하고 소금 노릇을 해야겠다고, 그것이 아주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인데도 그냥 한마디로 하면 다 되는 것같이 이야기”합니다. 모두 다가 그렇게 깊은 의미를 자기네 식으로 편하게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얼른얼른 말해 버리는지 알 수 없으나 의외로 오늘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그런 말을 자꾸 하기는 해도 도무지 생활에 있어서는 빛은 그만두고 소금 노릇을 제대로 해 보려고 하는 방향도 취하지 않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가 둘째로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세상에 요즘 돌아다니는 소위 세속화”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나 사상은 요사이에 돌아다니는 말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그것은 결국 세속화로 나아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에서 세속화라는 말이 왜 나왔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세속주의화와 세속화는 다른 것이라고 말들을 이상하게 만들어 가지고 굉장하게 떠듭니다만 세속화라는 말이 벌써 전에 있던 말인데 왜 하필 있던 말을 따 가지고 딴 의미를 붙이느라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만들려면 좀 다른 말로 멋있게 조작을 했으면 나을 텐데 꼭 있던 말, 오해하기 쉬운 말을 갖다 써 가지고 애매하게 이것인지 저것인지 모르게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요새 사람들의 방식이 썩 찬성할 만한 일은 못 됩니다.


어찌되었든 그 사람들이 부르짖는 세속화라는 말은 교회가 사회와 너무 유리되어 있으니까 사회와 직접 접촉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서 사회에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해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말하는바 소금 노릇은 뭐냐 하면 요즘 흔히 ‘사회 참여’라는 말이 많이 돌아다니는 데 그와 같이 사회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무엇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가 소금 노릇을 한답시고 소금이라고 자처하고 들어가서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고 딴 것이 되어 버리면 더 이상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 참여를 한다고 사회에 직접 관여해서 사회에 봉사를 한다거나 정치에 가담해서 정치적으로 활동하고 무엇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을 구체화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인간의 편법을 통해 자기네의 주장을 얻기 위해 기독교라는 이름을 자꾸 가지게 만들어 사람의 수만 채우는데 목적을 둔다면 그것은 진정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을 항상 주의해야 할 문제입니다.
 
과연 오늘 내 자신과 교회는 이 세상과 더불어 소금 노릇을 하면서 싸울 대상도, 싸울 방법도 모르고서 오직 사람의 수만 가지고 싸우려고 하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지고 싸우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사회 세력이라는 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의 수를 의존하고 있는 민족주의적인 형태의 정치적인 운동 가운데 뛰어든다면 그 사회 참여가 무엇을 만들어 주느냐 하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속성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종교 단체로서 수의 위력을 가지고 일을 하는 민주주의적인 체제하의 한 사회 운동으로 타락하고 만다 그 말입니다. 그러한 일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행하여지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많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보장으로 여겨 사람의 수를 늘리는데 목회의 목적을 두는 이상한 현상이 교회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정상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것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속성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사람의 수가 많이 모였다 해서 이것이 저절로 정상적인 교회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시는 너희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동일하게 간직한 사람들이니 때론 사회 참여를 하였다 그러니 우리가 이만큼 수가 많으니 우리의 역할을 하자. 우리의 목소리를 내자 하는 식으로 하여 무슨 운동을 하고 무엇을 차지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그릇된 사회 참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그러함에도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세속화에 빠져 사회에 참여하는 모습들을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을 표방하고 그것에 의존해서 사회에 어떤 작용을 하는 대신 자기의 수나 자기의 교세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력을 의지해서 활동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사회 참여라는 이데올로기이고 프로그램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가담한다는 것이 소금 노릇을 하는 것이냐 하면 오히려 소금의 맛을 잃는 행위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청년들이나 지도한다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툭하면 ‘교회는 사회 참여를 해야 한다. 무엇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보다 더 위대한 것, 그것보다 좀 더 본질적인 것,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때 소금이지 한 개의 단체로서 혹은 한 개의 종교로서 남들이 다 줄 수 있는 것을 주면서 소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간 오해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그릇된 생각입니다.


세상과 접촉이 없이 은둔하고 도피하는 것은 소금이 아니라고 했지만 소금 노릇을 한답시고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의 큰 프로그램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리는 것은 소금이 자기의 맛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의 맛을 중요히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9:50). 이 말은 너희 속에도 ‘소금을 치라고 하셔서 소금 없는 딴 짓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적인 맛을 잃어버린 다른 것을 가지고 기독교인 줄 알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두 가지 점을 항상 우리가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금의 노릇을 하기 위해 그릇된 세속화에 같이 빠져 들어 것에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내 자신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소금 노릇을 정당하게 하고 있느냐 입니다.


10. 항상 소금의 노릇을 하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하느냐 하면} 첫째는 “소금이 소금으로서 자기의 성질을 확보하고 있어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 됩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 자기의 그 독특한 성격을 늘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려면 끝까지 소금답게 자기의 짠맛을 보존하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어떻게 해야 교회가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의 확실한 태도를 취할 수 있어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금으로서의 확실한 자기의 위치를 갖게 되는 것이고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 노릇을 하려면 주님의 제자로서 자기 전부를 바치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좌우간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세 번째로 어떻게 해야 교회가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줄 확실히 알고 깨달아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금이 자기의 본질을 확실히 보유하여 소금으로서 조건을 구비되어야 자기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소금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1. 적용


1)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사명은 소금의 직분을 통해 교회로서의 특성을 충실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씨를 소유한 자는 소금의 역할(직분)을 정당하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세상에 대한 소금 노릇을 해야 하고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로서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게 하는 여러 가지의 그릇된 이론이나 사상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가되 예수님만을 제일 사랑하여 따라가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고 따라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5) 교회는 소금의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속성을, 교회의 속성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통해 생명을 택하는 것입니다.
6) 기독교인으로서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가운데 세속화에 빠져 기독교인으로서 본질을 상실한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지 늘 경계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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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0 마태복음 예수만이 안식이다 마11:16-19, 25-30  정용섭 목사  2017-08-04 369
14479 창세기 아브라함의 하나님 경험 창22:1-14  정용섭 목사  2017-08-04 414
14478 마태복음 두려워하지 말라 [1] 마10:24-33  정용섭 목사  2017-08-04 431
14477 창세기 돌보시는 하나님 [1] 창21:1-7  정용섭 목사  2017-08-04 545
14476 마태복음 삼위일체 신앙의 토대 마28:16-20  정용섭 목사  2017-08-04 297
14475 사도행전 교회와 성령 충만 행2:1-13  정용섭 목사  2017-08-04 576
14474 요한복음 복된 존재가 되는 길 요20:1-18  이한규 목사  2017-08-03 433
14473 마가복음 빌라도의 3가지 잘못된 선택 막15:8-15  이한규 목사  2017-08-03 374
14472 로마서 빚진 자 의식을 가지십시오 롬1:8-15  이한규 목사  2017-08-03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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