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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표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2)

에배소서 김홍전 목사............... 조회 수 311 추천 수 0 2017.08.09 23:42:08
.........
성경본문 : 엡4:11-24 
설교자 : 김홍전 목사 
참고 :  

성경: 4:11-24

제목: 그리스도의 표상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2)

 

1. 구원 경륜의 목표로서의 교회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의 어떠한 개체나 단체보다 존귀하고 신성한 것이며 또 그만큼 영광스러운 것임을 늘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찾아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서 예배당에 나오게 되면 그러지를 못하고, 그냥 믿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하고 마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의미에 대해서 주의하지 않는 사실로 인하여 교회관이 희미해지고 그런 희미한 교회 관 아래 허다히 많은 폐단이 생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큰 경륜의 순서대로 보면, 우리 개인 개인을 구원하셔서 개인 개인 운명과 장래를 결정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큰 내용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그 신령한 몸이 완전해져서 마침내 이 우주의 영광의 충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충만한 영광의 위치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도록 하신 다는 것이지, 김 아무개, 아 아무개, 박 아무개라는 개인에게 큰 복을 주어서 무엇을 해 보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바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하고, 흠이 없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참 자태를 형성해 놓는 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구원관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지는 그리스도 당신의 영광이 우주 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 충만하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가 완전히 독립한 한 개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개인이라고 하지만 철저히 고립 되어 있는 개인이 아니고 인류 사회라는 큰 덩어리 속에 사는 한 분자로서의 개인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가 고통하면 함께 고통을 받고 그 사회가 복리를 얻으면 개인도 복리를 나누어 받는다는 전체에 대한 개체의 관계를 이 세상 사람일지라도 다 배웁니다. 아무리 철저한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이 땅 위에 있으면서 자기만 어떻게 잘하면 자기 혼자 부요롭게 되고 평안하게 되고, 자기가 잘못하면 자기 혼자 고통을 당한다는 식으로, 늘 개인을 최종적인 단위로만 생각하는 사상은 원래가 그릇된 것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그것을 지적해서 가르쳤습니다.

 

예컨대 가정이라는 사회는 가장 잘 집약된 조직 사회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징벌조차 함께 받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이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들도 같이 무서운 진노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인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아담에게 모든 인류의 총대로서 의미를 갖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원래 잘못된 것입니다. 아담이 한 번 하나님 앞에 큰 약속을 어기고 계약의 길에서 벗어나는 죄를 번하였을 때 아담뿐 아니라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 아담을 대표로 놓고 보신 바 그 실체인 전 인류를 다 같이 정죄하시지 않았습니까? 전 인류가 함께 그와 같은 정죄 가운데 빠져서 고통하게 된 것은 다 잘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냐? 그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개인을 최종의 대상으로 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개인주의를 신봉한다면 결국 이 사회에서 매일 당하고 있는 사실조차도 무시하는 제 마음대로의 발상에 불과합니다. 그 사회가 번영하면 함께 번영하고 사회가 위축하면 함께 위축한다는 당연한 현실을 부정하는 제 마음대로의 생각이요 비현실적인 부정당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2.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

이 세상에서도 그렇게 사고를 하는 것인데 하물며 구원의 경륜에서는 그런 일을 더욱 철저하고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의 사실은 정죄 받아서 저주 가운데 있는 인류 사회에다가 사람을 그냥 놓아두신 것이 아니라, 거기서 뽑아서 새로운 한 사회에다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먼저 있던 사회의 분자로서의 의미와 지금 새로 들어온 교회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 들어온 지체의 의미를 비교할 때, 지금 새로 된 것은 일반 사회의 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주 강렬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한 몸이라는 정신을 내려주셨습니다. 교회를 그렇게 생각지 아니할 것 같으면 잘못된 길로 빠져듭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냥 모여 있으면 교회이고, 안 모여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부정당한 것입니다.

 

교회라 할 때 보편의 교회혹은 본질의 교회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는데 그 보이지 않는 교회가 어떤 형식을 취해서 땅 위에 보이는 형식으로 나타날 때 볼 수 있는 교회로 나타납니다. 볼 수 있는 교회가 하나의 사회 형태를 취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속성들과 본질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면에서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참된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집행과 권징의 실시라는 것인데, 그러나 어떤 단체이건 그것들을 다 갖추고 있으면 언제나 참된 교회라고 확실한 단언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과를 구분하려고 할 때 형식적인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옷을 입었다는 형식만으로 구분하려고 한다면 마네킹도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이고, 또 왔다갔다 걸어 다니고 말하고 웃는다는 형식으로 구분하려고 한다면 요새는 로봇이 그렇게 말도 하고 걷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형식적인 구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나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영혼의 기능이 어떻게 활동하느냐? 그런 활동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웃든지 울든지, 말하든지 생각하든지, 움직이든지 가만히 앉았든지 그것들은 모두 영혼의 기능들이 역사를 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형식적인 면, 외부로 나타나는 사회적인 조건하에서 그냥 구분하는 것이 최종적인 판단은 아닙니다. 참된 교회와 아닌 것을 바로 판단하려고 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의 기능과 같은, 참된 교회의 속성이나 본질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그 본질을 배워 가려고 합니다. 성경은 어떤 표상적인 용어들로 그것을 비유해서 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둘째는 하나님의 집 혹 성전이라는 말, 셋째는 새 예루살렘 혹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 그 다음 넷째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 하는 말로 표시를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이 제일 중요하고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먼저 이 문제를 이야기해 나가는 중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그 머리이다 하는 말씀이 성경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먼저 몇 군데 찾아보겠는데 에베소서 1:22-23절을 봅시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봉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은 아까 말한 것같이 결국 하나님의 경영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사 만물 안에서 그 영광이 충만한 데에 이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절을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립하는 것인가? 이것은 신자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됐다, 안 됐다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속죄의 은혜를 충만하게 입히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면 그 새로운 생명의 연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에게서 흐르는 그 생명으로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사람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들어가고 싶다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생명으로 연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 사실을 접붙임을 받았다는 말로 썼는데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얻을 때 원래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고로 그냥 덮어놓고 우리 교회는 한 단계가 되어서 한 몸이 됐습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있는 개체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 부분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교인들이 합심하고 단결을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그 사람에게 새 생명을 내려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신으로 온전히 매도록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가르치기를 우리가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동일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했습니다.

 

성령을 마신다는 말은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실체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고 상징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푸뉴마, 루아흐, 헬라말이나 히브리 말이나 다 같이 바람이란 말입니다. 그 근거로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자는 이와 같으니라](3:80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활동을 하시는 성령을 생각할 때는 그냥 바람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바람을 가리켜 한 바람 두 바람 하고 말하지 않으면, 여기 보면 한 성령으로 즉 동일한 유일의 성령을 마시고 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를 입히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것으로 인치시고 새로운 생명을 그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훌륭한 선생들 중에서는 특별히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사람은 성령 세례라는 말을 설명할 때 자꾸 자기주장으로 고집을 했습니다. 컵에다 물을 부어서 넘치는 것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서 넘치는 것이 성령 세례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와 같은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3. 지체의 역할은 새사람의 활동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볼 때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하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한 은사와 은혜를 받아서 가지고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다 같이 임해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신자 안에 늘 내주하시지만, 또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5:18) 하고 이야기해서 성령 충만이란 어떠한 특별한 시기, 일정한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 것이지 그것이 모든 신자에게 항상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신자가 다 성령 충만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면 한 성령으로 벌써 역사함을 받아서 세례 주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를 주었다는 말 즉 물로 부었다고 할 때에는 대체로 더러운 것을 씻어서 새로운 일을 하기에 적당하다는 상징으로 쓰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이제부터는 무엇이다하는 것을 특별히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의 죄는 씻기었다. 속죄의 공효를 입었다 해서 그렇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성령께서 우리 속에 계속해서 역사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마치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과 같이 늘 성령과 접촉해서 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 교회의 지체의 각 부분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신생을 시키는 은혜에 참여하고, 새사람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에 참여하는 데 있습니다. 즉 속죄와 중생, 그리고 성화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화의 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완성할 수 없을지라도 일생 동안 자꾸 성화의 경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를 늘 마시고 신선한 공기로 신진대사를 시키는 것같이 늘 성령을 마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런 사람인 곧 일생 동안 성화의 경지로 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접붙여 주심으로 성립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쓰게 됐습니다. 그렇게 성립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거룩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몸이라는 말이 그것을 표시하기에 적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의 각 부분, 지체의 각 부분을 보면 우선 동일한 생명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생명이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고 있고 만일 여기서 다른 동물 하나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별다른 생명이 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손이 움직이고 내 발이 움직이고 내 머리가 움직이는 것은 동일한 생명,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할 때는 결국 그 머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 한 생명이 손에도 발에도 다른 지체에도 함께 작용하고 지배하므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할 것 같으면 동일한 생명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요한일서 5:12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0:28절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한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거기 있는 것을 가르쳤는데 영원한 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육신에 속하면 즉 그 사람이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으로 움직이지를 않고, 제 마음대로 하던 바 아담적인 생명의 계승자로서의 자기, 즉 옛사람으로 그냥 행동한다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을 다시 한 번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한 것에서도 보듯이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지위를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능력이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서, 지어 놓으신바 내 속에 있는 새사람이 역사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작용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참 교회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새사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새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이 완전히 일치돼서 자연스럽게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명령하시고 주장하시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움직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인 그가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이라는 옛사람이 계속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좇고 자기가 무엇을 한번 해 보겠다고 자기 이상을 좇고 나가면 절대로 새사람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 하는 것 보니까 썩어져 가는 구습, 부패한 이 세상과 그런 옛날의 습관 그대로 하는구나. 그 유혹의 욕심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것이 옛사람이다. 이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돼서 네가 성령의 그 성화하시는 큰 능력 가운데서 새로 주신 바 새사람이 너에게 역사하도록 하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활동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이라는 말이 골로새서 3:10절에도 있습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 너희가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자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창조하신 자의 모양이 결국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네게 있는 새사람이 그 모양이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은 바로 네게 있는 새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새사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 성령님이 늘 충만히 역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 몸의 지체로서의 본분을 나타내는 것이고 지체로서의 성질을 또한 나타내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고 저절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체로서의 형식에서 볼 때에도 말씀의 전파와 성례와 집행과 권징의 적용이 거기에 꼭 있어야 하지만 그 실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자격과 영광과 능력을 발휘해야 거기에서 지체로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고 유혹의 욕심을 쫓아다니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종교의 욕심도 또한 유혹의 욕심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종교욕이라는 것도 적잖이 큰 욕심을 작용합니다. 자기가 아는 바 종교를 열심히 신봉하면서 왕성하게 해 보려고 하는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요새 다 텔레비전에서 보지만 모하메드교를 믿는 사람들을 오늘날 20세기의 정신으로 평가할 때, 그들은 뻔 한 잘못인데도 그런 어리석은 일들을 마치 알라 신이 나타나서 해결할 것같이 생각하고 그냥 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중에 종주를 막 신화해 가지고 높이 올려 앉히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20세기에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어떤 종교의 욕망 가운데 들어가 놓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하메드교만이 아니라 힌두교, 또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지라도 불교 같은 종교도 다 저희 나름의 형식과 규율이 있어서 그 규율과 제도의 가르침을 좇아서 그냥 열정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도 그런 식으로 취하고 나아가면 좋으냐 할 때 기독교 안에는 사이비 진리와 진리가 딱 갈라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형식을 동일하게 취해서 종교에 열중을 하더라도 긴 것과 아닌 것은 분명히 갈라집니다. 아닌 경우 기독교라는 한 종교는 만들 수 있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므로 거룩한 교회의 참된 자태는 아닙니다.

 

한국에 기독교라는 종교 형식을 취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는 것을 다 잘 아십니다. 기독교를 놓고 비판하는 무슨 심포지엄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사람들의 평은 기독교가 주술적인 샤머니즘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른 것을 찾지 못하는 까닭에 처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든 기존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서 어쨌든지 복을 받으려고 종교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데 샤머니즘에 가까운 행동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 주술적인 의미의 제사장 혹은 직업적인 종교인이 와서 축복해야만 복이 오고 또 그런 이가 참여해서 무엇을 해 주어야만 된다고 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그런 것만이 아니지요. 전체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게 움직일 때 그렇게 합니다. 그 욕망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 아주 냉철하게 비판이 되어야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무슨 욕망이 생기면 자기 생각에 그것이 옳다고 단정을 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부흥회 할 때 교회에서 여기 지금 빈자리가 많사오니 모든 자리가 꽉 차게 해 줍소서하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 욕망인 것입니다. 그 자리가 꽉 차면 무엇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자리가 차지 않고 그냥 지나가더라도 처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것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안 들어 주셨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일도 없이 그냥 그 시기만 지나면 끝나고 맙니다. 이러한 기도가 무책임한 기도인데 그러면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욕입니다. 종교적인 열정이라 말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열정에 의해서 기독교를 이룩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옛사람적인 욕망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12:11) 했지만, 거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 하라는 것은 새사람의 중요한 덕으로서 이야기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어떤 사람이든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뛰기만 하면 그것이 곧 새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도이든 힌두교인 이든 모하메드교도 이든 다 어떤 종교 규율을 엄격하게 잘 지켜가려면 게을러 가지고는 못합니다. 모하메드 교도들을 보세요. 그들은 시간이 될 것 같으면 장소 여하를 불구하고 땅에 엎드려서 절하는데 그것이 보통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거기에 열정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됐다는 것은 이론만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위치인 기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난 사람입니다. 그것은 혈기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생각으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이요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의 존재의 위치가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신앙의 지표가 있습니다.

 

신앙의 지표가 무엇이냐 하면 그 생명이 땅 위에서 정상적으로 활동을 해서 열매를 거두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는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체적으로 연결돼 있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생명이 그에게로 왔다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과 정신이 결국 그를 지배해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손발이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꾸 움직이면 그것은 이상한 현상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게 움직이려고 한다면 머리에서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발과 손이 다 합쳐서 머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손이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고 그렇게 명령을 받아서 가는데 발은 도무지 동쪽으로 돌리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면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교회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과 지시와 인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려면 새사람적인 성격이 거기에 명료하게 또 충분히 나타나야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역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의식이 없이 덮어 놓고 그냥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다고 모여 있으면 어떻습니까?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의 임무를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만 드린다는 것만 가지고 지체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잘 나오기 때문입니다.

 

단체로서 교회를 증명할 수 있는 최초의 행동이면서 그 구성원의 최초의 의무라고 할 만한 것은 결국 회집입니다. 그 회집에 오면, 기독교이니까 기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사회단체든지 단체로 조직되어서 모이면 그 단체를 스스로 증명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종교가 규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모하메드교, 힌두교도, 불교도들이 모이면 다 자기네의 필요에 따라서 제정한 대로 자기네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가 각 지체로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다 감당한 것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못 내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반 주의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규정된 날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새사람으로서 자의식이 있어 가지고 움직일 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새사람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으로도 모이는 것딥니다. 그런고로 예배를 드린다는 행위 가지고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증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옛사람인가 새사람인가?, 가라지인가 진짜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라 할 때에 그 지체의 참된 열매와 증명이 무엇이겠는가를 더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의 연결이라는 것은 아주 기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5. 지체에는 그에 따른 은사가 있음

새사람으로 활동을 하려고 할 때 생명의 연결이라는 기본적인 사실과 더불어 또 하나 지체로서 각각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로마서 12:4-8절에 볼 것 같으면, 지체 각각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에 의해서 각자는 교회 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해 놓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이면 가르침으로 권위 하는 자이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또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이렇게 각각 은사가 있어서 교회 안에서 그 은사가 조화 있게 봉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람들을 세우셔서 각각 그 받은바 은사대로 하나님 앞에 진실히 활동하게 하신 것인데, 이런 것들을 하려면 사랑 안에서 기본적인 덕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1-12절에도 볼 것 같으면 교회 안에 사람을 세우되 혹은 사도로 세우시고, 혹은 선지자로 세우고,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고, 혹은 목사로도 세우고, 교사로도 세웠는데, 이렇게 한 것은 성도의 생활을 결핍됨이 없이 온전케 하려고 그런 것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은 주로 교회의 직분자들 이야기입니다. 사도, 예언자 즉 선지자, 혹은 복음 전하는 사람, 목사나 교사가 다 특별히 교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교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각각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각 지체는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른데, 예언하는 사람 즉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섬기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섬기는 일이야 저마다 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을 각각 자기가 받은바 은사대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권고하기도 하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권고하는 일은 반드시 교사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구제하는 일은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성실한 마음으로 할 사람이 구제를 하는 것이지, 구제하는 사람 따로 내서 하고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또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기쁨으로 할 것인데 이런 것들은 다 교인들이 저마다 받은바 은사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에 거짓이 없는 사랑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저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라.” 교회에서 가질 이와 같은 원덕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바로 드러내야 비로소 지체로서의 자격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지체라 하고 실제로는 가라지인지 진짜 지체인지 알 수가 없는 위치에만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증거자로서의 의미는 못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 위에서 교회로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신령한 생활을 해야만 새사람이 늘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새사람이 나타나야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호흡하고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조건들이 드러날 때 비로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6.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7. 참된 교회는 거룩한 자태를 바로 드러낼 수 있어야

 

8. 교회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지체의 각 부분인 것을 열매로서 증명하고 살아갈 수 있어야

 

9. 교회는 형식이나 종교적인 감정으로만 움직이는 데에 경계해야

 

 

김홍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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