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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2:3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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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69671158 |
2012년 10월 2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2장 34절~40절
설교제목 :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가 사두개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마태 22:34~40)】
<성서 이야기>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의 권면은 간단하고 명료하지만, 사실 이 권면은 깊은 의문점들을 품게 만드는 골칫거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오감(五感, 눈코입귀손)으로 느껴질 수 없는 무정형(無定型)의 실체이며, 더불어 사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 역시 그리 쉽지만은 않은 난제(難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이웃 사랑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화 하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동네 불량배들 둘이 술만 취하면 자꾸 수도원 담장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들은 조용한 수도원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난동을 피웠습니다. 젊은 수도사가 이 술꾼들을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고, 급기야는 주먹다짐이 오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불량배들은 전치 4주의 진단서를 끊고 와서는 젊은 수도사를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담당형사가 수도사를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놈들은 상습범이에요. 매번 이런 일을 만들어서 상대편에게 돈을 뜯어냅니다. 내가 오래 전부터 꼭 잡아넣으려고 벼르고 있었어요. 전치 4주 진단도 순 엉터리예요. 저 정도 상처로는 4주 진단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수도사님도 어디 잘 아는 병원에 가서 3주 진단 이상 되는 진단서 하나만 받아오세요. 그러면 맞고소가 돼서 문제가 잘 해결 될 겁니다.”
젊은 수도사는 경찰서를 나와서 평소 형제처럼 지내는 병원의사를 찾아가서 저간의 사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의사는 다 듣고 난 후 조용히 생각하더니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을 보게, 교회를 보게, 모두들 진실되게 살라고 말들 하지만 오히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많지 않은가? 수사(修士)만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자네의 영혼이 원한다면 내가 해 줄 수 있어. 그러나 진정 그것이 자네의 영혼이 원하는 것인가? 돌아가서 잘 생각해봐. 자신이 진정 원하는가를. 그래도 정말 자네의 영혼이 원한다고 확신하면 내가 그 이상의 진단이라도 할 수 있어.”
젊은 수사는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어디 숨을 데도 없는 병원진료실에서 꽁꽁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 짧은 순간의 혼돈스러움이 지나고 도망치듯 그 병원을 빠져나왔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으로 수도원으로 돌아온 수사는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다가, 드디어 결단을 하고 동네 불량배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폭행 사실에 대해서 깊이 사과하고, 합의금을 전달해서 해결했던 것입니다. 며칠 후 그 의사는 젊은 수사를 만나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그래 자네가 세상을 이긴 걸세. 수도사만큼은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잘 했어.”
<예화에 대한 해석>
글쎄요. 이 짧은 예화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권면을 제대로 이해하게 만드는 ‘열쇠 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요. 맞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온 세상은 미쳐 돌아갑니다. 이웃이 이미 이웃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이 ‘따뜻한 이웃’이 아닙니다. 그 이웃이 폭도와 같습니다.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고, 뾰족한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독종이며, 이해타산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차가운 인간입니다. 그게 ‘네 이웃’의 실상입니다. 그 무서운 이웃을 어떻게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흉악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 수사(修士)뿐입니다. 즉 수도사처럼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야 그때 비로소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또 하나 물음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하느님을 수도사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글쎄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수도사의 하느님 사랑이란 곧 ‘무(無)의 체험’입니다. 뭐랄까. 이 세상의 덧없음을 아는 것이며,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아웅다웅을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 세계의 ‘감정과 이성’ ‘정서와 논리’ … 우리 삶의 야박한 셈법을 초탈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無)의 실체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우리 자신이 무(無)의 세계로 건너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의 결론>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어린아이처럼 순박하지만은 않고, 또 순한 양처럼 만만하지만은 않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미쳐 버린 세상에 “치고 치어서, 닳고 닳아서, 억눌리고 뒤틀려서” 그 아름다웠던 영혼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채 괴물처럼 소리 지르는 이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무서운 이웃을 어떻게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정답은, “수도사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입니다. “하느님의 무(無), 무(無)의 하느님을 깨달은 자만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다”, 그게 정답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 합시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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