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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5:3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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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73978501 |
2012년 12월 2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5장 31절~40절
설교제목 :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며”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는 모든 민족을 자기 앞으로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31~40)】
<설교 이야기>
경허 선사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점잖은 선비 한 사람이 찾아와서는 법문(法文), 즉 한 가르침의 말씀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선사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 선비는 허탈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갔습니다. 그 얼마 후에 또 다른 선비 한 사람이 찾아와서 선사에게 술을 선물로 주면서 법문(法文)의 말씀을 청했습니다. 이에 경허 선사는 그 술을 다 마시고 난 후 거나하게 취해서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에 대해서 열정어린 법문을 토해내셨습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를 다 지켜본 제자 만공 선사가 나중에 경허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술을 사온 선비에게만 법문을 해 주셨는지요?” 이에 선사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보게 법문이란 게 술에 취해서나 겨우 할 수 있는 일이라네.”
오늘 경허 선사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법문이라! 즉 설교(說敎)라는 것! …… 가당치 않은 것이죠. 누가 누구에게 가르침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다 똑 같은 무지렁이, 즉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인데, 감히 누가 가르치는 자이고, 누가 배우는 자이겠습니까? 그리고 또 경전에서 몇 가지 문구를 떠올린 후, 인생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우주 만물에 대해서, 특히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떠벌린다는 게, 가당치 않은 일이죠. 세상은 기기묘묘한 데, 문자(文字)에 사로 잡혀 있는 설교라는 게 그 한계가 명백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쩌면 다 부질 없는 짓입니다. 설교 혹은 법문이라!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모두 다 헤매고 있는 형편이라 누구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지만, 누군가 하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강단에 오르는 일 …… 그러니 경허 선사의 말씀처럼 ‘술에 취해서나 겨우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맨 정신으로는 부끄러움 때문에, 적절하지 않음 때문에 못하는 일입니다.
<성경 이야기>
예수께서 비유로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최후의 심판 때, 하느님께서 악인(惡人)과 선인(善人)에 대해서 최종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심판의 기준으로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는가”를 물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31~40)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이런 저런 생각을 잠깐 해보겠습니다.
<설교 : 하나 둘 셋>
첫째로 예수의 이 비유를 들으면서 무릎을 치면서 호응하게 되는 차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특히 권력자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을 언제나 입에 올린 채 살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제국의 백성들을 통치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 앞에서 주눅들어 왔고, 동시에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갖고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오늘 비유는 이를 뒤집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을 말하지만, 예수는 그 반대편을 이야기합니다. “작고 약하고 소박한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작고 약하고 소박한 것’에 대해서 인간들이 갖고 있는 태도가 곧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가르는 잣대였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거리게 됩니다. 예수의 이 놀라운 역설(逆說)의 가르침 앞에서 고개를 숙이면서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게 됩니다.
둘째로, 그러나 이 비유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한계에 대해서 자유롭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심판, 즉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하는 대목에서 임금이 있고 또 그 아래에 백성이 있는 왕조시대의 틀을 이야기 거리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오늘날 상황에서 맞지 않는 ‘이야기 틀’입니다. 부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는 왕조시대가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이 비유는 ‘또 다른 차원들’로 진화해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동화작가라면 예수의 이 비유를 어떻게 다르게 변주(變奏)시킬 수 있을까요? 그게 우리의 중대한 숙제입니다.
셋째로, 역설(逆說)의 영성(靈性)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비유도 그중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 즉 맹목적 추종자가 아닌 - 우리는 예수의 메시지에 대해서 ‘역설의 역설’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기독교가 사막의 종교로서 출발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기독교의 윤리는 너무 삭막합니다. 빈틈이 없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도 완벽한 윤리를 강압합니다. 그것이 과연 하느님께서 일깨워주시는 진리의 모든 것일까요? 글쎄요. 그 반대편을 자유롭게 상상해 보고자 합니다.
<설교의 결론>
왕조시대가 해체된 지금 이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작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은 고통 받는 존재로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사랑, 긍휼의 마음이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아울러서 예수께서 촉발시켜 주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담론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심층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대동사회(大同社會)는 ‘크고 강하고 화려한 것들’이 해체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이와 동시에 ‘작고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 역시 무화(無化)되는 사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분조차 사라지는 큰 도(道)가 이뤄져서 모두 하나가 되는 사회,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해 주신 오늘 비유의 최종적 도착지점일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며”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하늘의 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꿈꾸며”|작성자 말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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