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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6:3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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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175041970 |
2013년 1월 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6장 31절~35절
설교제목 :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사람’
<영성 시>
이제 와 우리 죽을 때에
* 박노해
하느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제 남은 길이 아무리 참혹해도
다 받아들이고 그 길을 따를 테니
제가 죽을 때 웃고 죽게만 해 주세요.
다른 거는 하나도 안 바랄게요.
그때가 언제라도 좋으니
"저, 잘 놀다갑니다."
맑은 웃음으로 떠나게만 해 주셔요.
저도 제 사랑하는 이들께
삶의 겉돌기나 하는 약속 따윈 하지 않을게요.
오직 한가지만 다짐할게요.
우리 죽을 때 환한 웃음 지으며 떠나가자고
"고마웠습니다. 저 잘 놀다갑니다"
그렇게 남은 하루하루 남김없이 불살라가자고.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 떼가 흩어질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뒤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1~35)】
<성경 이야기>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베드로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모른다”고 부인(否認)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 즈음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점이 떠오릅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상하셨을까요? 예수께서 미래를 내다보시는 초능력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물론 그러셨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 봅니다만, 그런 상상보다는 아주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설명을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해서 베드로의 부인을 예상하셨을까요? 그것은 제가 보았을 때, ‘영성의 내면화’라는 말로 설명이 될 듯합니다. 예수께서 보았을 때, 당시 베드로는 아직 ‘영성의 내면화’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수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베드로는 아직 속사람의 거듭남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 처형의 광풍을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성의 내면화란>
그래서 우리는 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영성의 내면화’ 혹은 속사람의 거듭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성령을 받았다는 둥, 하나님을 만났다는 둥, 신비체험을 했다는 둥 … 뭐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만,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체험들보다 몇 배나 소중한 것은, 그 마음과 정신에 있어서 세속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넘어서는 영성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인격의 전 존재가 세속적 가치관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비본질적 세계관을 벗어나서 영성적 가치관이라고 표현하게 되는 본질적 세계관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성의 내면화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영성의 내면화’(속사람의 거듭남)를 이룰 수 있을까요? 물론 그 길은 많고도 다양하겠습니다만, 오늘은 중국의 영적 스승 노자가 제시해 주신 길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노자 이야기>
요즘 『대교약졸』(박석 지음, 들녘출판사)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영성의 내면화에 이르는 과정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노자의 『도덕경』 56장에 주목했습니다. 【구멍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풀고, 빛을 부드럽게 해 티끌과 하나가 된다. (塞其兌하고 閉其門하며 挫其銳하고 解其粉하며 和其光하고 同其鹿하리니.)】이 구절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 색태폐문(塞兌閉門)의 단계요, 두 번째로는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화예해분(挫銳解粉)의 단계이며, 마지막은 빛을 두르럽게 해 티끌과 하나가 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단계입니다.
색태폐문(塞兌閉門), 즉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 단계는 감각기관을 막아서 외부로부터의 유혹을 막고 생명 에너지를 모으는 양생(養生)의 수련입니다. 화려한 소리와 빛깔, 그리고 자극적인 맛은 쾌락을 주는 원천인 동시에 거기에 탐닉할 경우, 우리의 생명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주범이 됩니다. 아울러 우리의 마음을 흔들리게 해 깊은 고요를 알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수도자들은 감각기관을 막아서 감각적인 쾌락을 자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쾌락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이 깊이 주목하고 반성해야할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화예해분(挫銳解粉), 즉 외부로 향하는 감각기관을 닫고 생명력을 그린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두 번째 단계인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단계로부터 본격적인 수도생활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날카로움을 꺾는다는 것은 마음의 모난 부분을 꺾는 것을 말하고, 얽힘을 푼다는 것은 마음 속의 여러 가지 매듭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모난 사람은 끊임 없는 갈등 속에서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얽힘이 많은 사람도 마음 고요할 날이 없습니다. 모난 마음이 둥글어지고 얽힌 매듭들이 풀릴 때 비로소 마음은 고요해지고 텅 비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허정(虛靜)의 경지랍니다. 노자는 허정의 극치에 이르렀을 때, 천하만물이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양생(養生)의 단계와 수심(修心)의 단계를 거쳐 일반적인 수양에서 최고의 경지로 여기는 현묘한 도(道)를 체험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혹은 독특하게도 노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수도의 단계’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입니다. 화광동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문자적 의미로만 해석하자면, 화광동진은 “빛을 부드럽게 해서 티끌과 하나가 된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빛이란 깨달음의 빛 또는 거기서 나오는 성스러움의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수도나 명상 등을 통해 일상적인 감각과 개념의 지배를 벗어나 깊은 내면세계 또는 초월적인 세계를 알게 되면, 그 눈이나 얼굴에서 무언가 성스러움의 광채가 나오게 됩니다.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유대의 선지자들은 야훼의 계시를 받거나 야훼를 만났을 때, 빛을 체험하고 그 빛이 그들의 얼굴에도 나타나곤 했습니다. 예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이 빛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빛은 아닙니다. 신비주의자들은 보통 그것을 후광(後光), 즉 성스러움의 아우라(Aura)라고 부릅니다. 천하만물의 근원인 도(道)를 알게 된 노자 또한 분명 그런 성스러움의 빛이 뿜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자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티끌과 어울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티끌이란 당연히 빛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범속함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화광동진이란 바로 영성의 성스러운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것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와 보통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베드로 이야기>
예수와 함께 동행했던 베드로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는” 양생(養生)의 과정도 별로 없었고,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수심(修心)의 과정도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빛을 부드럽게 해 티끌과 하나가 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설교의 결론>
하느님의 진리를 그 생각과 마음과 정신, 즉 그 영혼 가운데 깊이 내면화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성을 내면화한 사람이라야 진정한 하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구멍을 막고 문을 닫아서” 하늘의 기운을 모으는 양생(養生)의 사람, “날카로움을 꺾고 얽힘을 푸는” 수심(修心)의 사람, 그리하여 마침내 그 영혼 가운데 성스러운 빛을 뿜어낼 수 있는 화광(和光)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저 세상의 더러운 티끌과 하나가 되는, 즉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가는 동진(同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사람’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하늘의 하느님이여. 땅의 예수여. 바람의 성령이여!
이제는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이 땅에서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사람’|작성자 말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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