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8:26-39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40344 |
어두운 심연으로부터의 해방
롬 8:26-39, 성령강림후 여덟째 주일, 2017년 7월30일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
‘구원이 뭐냐?’ 하는 질문, 또는 ‘구원 받았습니까?’ 하는 질문이 이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진지하게 들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가하게 들립니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진지하게 대하다가 어느 정도 연륜이 흐르면 그 질문을 아예 입에 올리지 않거나 또는 상투적으로만 대하면서 대신 교회 생활이나 이 세상살이에 몰두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위기입니다. 오늘 저는 이 문제를 실존적으로 치열하게 붙들고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전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해당됩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깊이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롬 8:26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바울의 영혼은 지금 무엇을 기도해야할지를 모를 정도의 어두운 심연에 떨어져 있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기도할 마음이 없다거나 기도의 영성이 훼손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할 말도 많고, 따라서 기도할 내용도 많은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라고 하면 그는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챙겨야 할 교회도 많았습니다. 유대 기독교와의 갈등도 매우 중요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에도 언젠가 가봐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은 기도할 내용도 많은 법입니다. 그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는 말은 자기 인식의 한계를 절감한다는 뜻입니다. 작은 대목에서는 아는 게 많습니다. 신학적으로 논쟁할 자신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과정과 미래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낡고 늙고, 그리고 결국 죽습니다. 허무에 떨어집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예외 없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오늘 성경 본문 앞 구절인 롬 8:18-25절에서 이 사실을 절절한 마음으로 진술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22절).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이 무엇인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아실 겁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가본 적이 있으신지요. 거기에 환자로 들어온 분들도 젊은 시절에는 다 멋진 인생을 꿈꾸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기도 했습니다. 잠들지 못한 채 마지막 호흡에 붙들려 있는 그들의 탄식과 고통은 남의 것이 아닙니다. 아프리카 난민들의 떼죽음 소식이 자주 들립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대다수가 어리거나 젊은이들인 그들이 최소한의 생존 조건을 찾아서 지중해를 건너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바닷물 속에 빠져 죽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이 그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탄식과 고통은 그리 멀리 있는 것만도 아닙니다. 7월 한 달간 서울에 강의가 있어서 네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동대구역을 드나들 때마다 어떤 한 사람이 눈에 밟힙니다.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남루하며, 오래 씻지 않아 보이는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고 표정은 없으며, 장애라 할 정도로 하체가 짧은 한 남자가 거의 하루 종일, 늦은 밤까지 대합실에서 어정대고 있습니다. 간혹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습니다. 노숙자 중에서도 가장 상황이 나쁜 경우입니다. 저를 비롯한 승객들은 자기 일에 바빠 다 스치고 지나갑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을 그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탄식과 고통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런 것만 보냐, 사랑스럽게 행복하고 감동적인 사람과 그런 일도 세상에는 많지 않느냐, 하고 말씀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가능한 인생살이를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야겠지요. 우리가 보통 세상 사람이라면 마음 불편한 일들과 우리가 나서서 해결해주지도 못할 일들은 가능한 멀리 하고, 뜻이 맞고 수준 맞은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도 됩니다. 요즘처럼 험악한 세월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괜찮은 인생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피하고 싶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예컨대 세금을 더 올리더라도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서 서로 노력해야겠지요. 중요한 것은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을 남의 일로 미루지 말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다른 피조물만이 아니라 지금 구원을 약속받은 기독교인들도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23절). 바울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층적으로 정확하게 보고 있는지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탄식과 고통은 끔찍한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서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몸의 속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모두 해당됩니다. 이런 엄정한 사실을 진지하게 내다보지 못하면 구원 문제는 절실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구원과 거리가 먼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배고프면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먹는 것만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온 세상을 잃은 것처럼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너그럽게 대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인색해지고, 남을 비판하는 데 온 신경이 작동됩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이런 인간적인 속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개인을 보면 다 좋은 신자들인데도 함께 모이면 문제가 벌어집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아무도 완전한 사랑을 행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내면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면서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을 무조건 잡으려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자신에게 반복해서 절망할 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똑같이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 삶의 어두운 심연입니다. 이런 것에 지배당하면 심리적으로 우울증 증상을 보입니다.
성령의 간구
바울은 여기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심연에서 살아가지만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6절에서 그걸 말했고, 다시 27절에서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손에 잡힐 정도로 이해되는 건 아닙니다. 막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성령이 당신과 함께 하시니까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거나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주시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걸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면서 그냥 입으로만 말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성령과 하나님을 하나로 생각합니다. 성령이 간구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간구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즉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면 어두운 심연이라는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라고 대담하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결정적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일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런 구절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억지로 이해하거나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 말씀을 그대로 생각해보십시오. 이 구절의 논리는 허약한 게 아닙니다. 일상을 예로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귀하게 키운 아들, 또는 딸을 결혼시키는 부모가 있다고 합시다. 며느리, 또는 사위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두 사람이 사랑한다 하니 받아들였습니다. 딸을 사위에게 주었고, 아들을 며느리에게 준 것입니다. 자식을 준 것은 모든 것을 준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선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깊은 심연과 같아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앞길을 인도하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문제는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믿기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건 헬라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이런 표현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자식을 낳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시편 44:22절을 인용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약에 근거해서 해석한 것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36절).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건조한 교리로만 받아들여집니다.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능력은 없어지고 문자만 남았습니다. 아주 특별한 예를 들어도 이해를 바랍니다. 여기 자식을 잃고 참척의 고통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식이 장애였다고 한다면 고통은 더 심해집니다. 그 자식을 위해서 삶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던 부모들은 인생살이에서 더 기대할 것도 없고 더 실망할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신들이 죽어도 괜찮다는 마음까지 듭니다. 구원의 경지에 들어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사랑했던 자식의 죽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성취하는 것에 인생을 걸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새로운 생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겁니다. 문제는 예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실제로는 예수가 자식보다 더 가까운 하나님의 아들인데 말입니다. 바울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전체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알 때만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저도 바울의 진술에 동의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35절과 39절에서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 두 구절을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9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어두운 심연으로 묘사된 항목들은 일곱 개이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묘사된 항목은 (38절 포함)열 개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때 피할 수 없는 심연들입니다. 이런 것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외치는 바울의 절절한 심정이 전달됩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어디서 어떻게 경험한 것일까요?
다시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다도(茶道)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믈리에나 바리스타도 비슷할 겁니다. 차를 마시는 데 무슨 도가 필요하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세계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분명히 그게 도입니다. 차의 세계를 무한히 넓게 경험하는 겁니다. 거의 끝이 없을 정도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의 물리 화학적 상태가 중요합니다. 물의 온도도 중요합니다. 차를 물로 우려내면서 그 차의 성질도 알아챕니다. 차를 만들 때의 날씨가 어땠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차를 여러 번 우려내면서 무한한 희열을 느낍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겁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극진한 사랑을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는 깊이에서 경험했습니다. 삶의 어두운 심연도 이를 막아낼 수가 없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사랑의 내용은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칭의(稱義)가 그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율법에 묶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당시 세상을 재단하던 절대 이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관점으로 바꾸면 자신의 능력에 벗어날 정도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을 겁니다. 이게 말이 될까요? 이것 자체만으로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때만 이게 말이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명을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서 바울의 이런 진술을 어렵다거나 관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느낌과 어떤 생각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까? 어두운 심연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세상살이를 어떻게 버텨냅니까? 어떤 이들은 어두운 심연을 외면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가장 진지하게 삶을 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바닥에 놓여 있는 어두운 심연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가까이, 그리고 더 솔직하고 진지하게 직면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바울처럼 소리 높여 외치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어내지 못한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