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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7:1-4, 1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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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41624 |
요셉과 그 형제들
창 37:1-4, 12-28, 성령강림후 열 번째 주일, 2017년 8월13일
1.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2.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12.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 15.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18.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20.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21.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3.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25.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세기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족장들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시대는 일반 역사에서 말하는 씨족사회입니다. 첫 인물은 아브라함이고, 두 번째 인물은 이삭이며, 세 번째 인물은 야곱입니다. 세 명 중에서 이삭은 무게가 좀 떨어지고 아브라함과 야곱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야곱은 아들을 열두 명이나 두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아들을 많이 두는 것이 가문의 자랑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합니다. 열두 아들의 목록이 창 35:23-26절에 나옵니다. 짐작하겠지만 열두 명의 아버지는 한 사람 야곱이지만 어머니는 네 명이나 됩니다. 여기에 얽힌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야곱이 원래 사랑한 여인은 외삼촌 라반의 둘째 딸인 라헬입니다. 야곱의 이종 사촌입니다. 고대는 근친결혼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야곱은 언니인 레아와 먼저 결혼하게 되고 나중에 라헬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자매를 다 아내로 맞은 겁니다. 레아를 통해서는 르우벤을 비롯해서 스불론까지 6명의 아들을, 라헬을 통해서는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아들 낳기 경쟁을 벌였습니다. 자기들의 몸종을 남편 야곱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라헬의 몸종인 빌하를 통해서 단, 납달리를 낳았고, 레아의 몸종인 실바를 통해서 갓과 아셀을 낳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만한 야곱 가족이었습니다. 문제는 엉뚱한 데서 벌어집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인 창 37:1절부터 전개됩니다.
야곱의 요셉 편애
야곱은 열두 아들 중에서 열 한 번째인 요셉을 편애했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한 라헬의 두 아들 중의 첫째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창 37:3절에 따르는 야곱은 늙어서 요셉을 얻었기 때문에 다른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더 늙어서 낳은 아이가 베냐민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야곱이 요셉을 편애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2절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17세의 요셉은 이복형제들과 함께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알게 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했습니다. 이런 고자질이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게 된 근본 동기일까요? 속사정을 우리는 모릅니다. 어쨌든지 야곱은 요셉에게만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잘못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형제들은 요셉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베냐민을 제외한 열 명의 형제들이 양떼를 몰고 세겜에 머물러 있었을 때였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세겜으로 보내서 양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라고 일렀습니다. 요셉이 세겜에 이르렀지만 형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수소문하여 도단으로 떠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양을 키우려면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서 떠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요셉이 가까이 오는 것을 멀찍이에서 확인한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몄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형제들의 음모가 이해는 됩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있는 요셉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겁니다. 실제로 요셉은 얄미운 짓을 골라가며 했습니다. 자칫하면 유산을 요셉이 독차지 할지도 모릅니다. 마침 쥐도 새도 모르게 요셉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그들의 작당을 20절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표현이 노골적입니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형제들이 말하는 꿈은 바로 앞 구절인 창 37:5-11절에 나옵니다. 요셉은 자기의 꿈을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밭에서 각자 곡식 단을 묶고 있었는데 요셉이 묶은 단은 일어섰고 형제들이 묶은 단은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했다는 겁니다. 형제들은 꿈 이야기를 기분 나빠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겁니다. 꿈 이야기가 너무 심했던지 아버지 야곱은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네게 절하게 된다는 말이냐?’ 하고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꾸짖기는 했지만 마음에 간직해두었다고 합니다. 이런 꿈 이야기를 듣고 형제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고 본문이 5절과 8절에서 반복해서 확인해주었습니다.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다.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모였다 하면 요셉에 대한 불만을 서로 나누었을 겁니다. 이제 그 미움과 증오를 속 시원하게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맏이인 르우벤이 형제들의 음모를 막아보려고 나섰습니다. 요셉의 피에 손은 대지 말고 대신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했습니다. 르우벤은 나중에 동생들 몰래 요셉을 웅덩이에서 끌어낼 심산이었습니다. 르우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성경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큰 형이니까 나중에 아버지에게서 문책당할 게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형제들 중에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반듯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을지 모릅니다. 어쨌든지 르우벤의 제안이 동생들을 설득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가까이 오자 형제들은 그를 잡아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다행히 웅덩이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다
동생 요셉을 웅덩이에 던져 놓고 형제들은 밥을 먹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뒤숭숭했겠지요. 아무리 미워도, 그리고 친 동생이 아니라 이복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요셉이 실제로 죽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요셉이 들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아버지 야곱을 속이는 일도 꺼림칙하고, 아버지의 낙심을 옆에서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성경기자는 형제들의 복잡한 심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사건의 진행만 건조하게 전합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이스마엘 대상이 보입니다. 그 대상들은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낙타에 싣고 길르앗에서 애굽으로 가는 무역상입니다. 유다가 나서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을 웅덩이에서 굶어 죽게 하는 것보다는 저 대상들에게 파는 게 낫다고 제안합니다.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그러자 형제들이 다 동의합니다. 이스라엘 대상과의 흥정은 은 20으로 결정 났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28절은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구덩이에 빠진 요셉을 나중에 살릴 계획을 짰던 르우벤은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9절에 따르면 르우벤은 요셉이 사라진 걸 보고 망연자실합니다. 형제들은 처음 음모대로 요셉의 채색 옷에 염소 피를 묻혀 아버지 야곱에게 가져갑니다. 야곱은 식음 전폐하고 울면서 이후부터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깁니다. 참척의 고통은 죽음과 같습니다. 성경기자는 28절에 이어서 36절에서 다신 한 번 더 상인들이 요셉을 애굽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형제들 사이에 벌어진 비열한 이야기를 끝냅니다.
요셉 전승을 전체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28절과 36절이 많은 걸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겁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애굽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가나안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을 때 자기 가족들을 모두 애굽의 고센으로 끌어들입니다. 지난 70,80년대에 미국에 건너가서 돈을 큰 번 사람이 자기 가족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거기서 대략 4백년 정도 지내다가 큰 부족을 이룬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감행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역사의 시작입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 40년을 거친 뒤에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전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애굽의 기마병도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온갖 시련을 다 겪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생존이 보장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는 의미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보십시오. 요셉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대상에게 팔지만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순간에 맏이인 르우벤이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왜 하필 그 순간에 대상이 그 지역을 통과했을까요? 더 앞서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야곱이 사랑하던 라헬이 죽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성경기자와 이 이야기를 읽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 요셉과 형제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너머에, 그 깊이에, 그것의 바탕에 놓인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 신비롭고, 그래서 전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요셉과 형제들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서 예수의 운명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예수의 모형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비슷합니다. 요셉은 은 20에 팔렸고, 예수님은 은 30에 팔렸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운명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자세히 보십시오. 매우 비극적이고 폭력적인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유는 요셉의 침묵과 무저항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님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벌을 내릴 겁니다.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다 알게 될 겁니다.’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최고 권력인 산헤드린과 로마 총독의 폭력 앞에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묘사했습니다.
역사의 신비, 열린 미래
다시 요셉과 형제들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동생을 대상들에게 파는 장면과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는 장면 사이에는 대략 400년의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어떤 누가 이 두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역사의 신비입니다. 이것은 곧 역사가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서 일반 역사학자들은 자연 원리라고 말합니다. 세속의 역사관은 원인과 결과의 과정에 무게의 중심이 있다면, 기독교의 역사관은 종말론적 미래에 무게의 중심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상징하는 ‘알파고’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국 인공지능을 통해서 역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데이터를 정확하게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결정론적 역사관입니다. 이와 달리 기독교 신앙은 미래가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개방된 역사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인공지능이 역사의 미래를 예측해낼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가까운 미래는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결정론적 역사관은 우리를 숙명주의에 떨어지게 합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다음입니다. 유전자 공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면 앞으로 모든 뛰어난 점을 갖춘 아이만 낳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행복하게 살게 될지를 유전적으로 결정된 아이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운명이 이미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 아이는 그런 숙명에 따라서 이 땅에서 즐거운 일만 경험하고 살게 됩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더 근본적으로 이게 인간의 행복을 담보해줄까요? 그건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행복과도 거리가 멉니다.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일어났을 때에야 왜 일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럴 정도로 세상과 자연과 우주에는 심층적인 힘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열린 것으로 볼 때만 우리는 역사에 실제로 깊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수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20년 전의 여러분이 어디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20년 후인 오늘 우리가 대구샘터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인해서 요셉을 팔은 거와 같은 어떤 사건들이 여러분 주변에서 일어난 겁니다. 실감이 나지 않으신지요? 잊지 마십시오.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악한 사건들도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기에 하나님에게서 악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을 사탄의 소행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유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놓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순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와 세상의 깊은 차원을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사탄이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팔아버리는 것과 같은 일들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됩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인가?’라는 대답으로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부분적으로만 허용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배타적 능력으로 역사를 통치하십니다. 바르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에서 부분적으로 불협화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완벽한 교향악을 이룬다.’
한편으로는 신비롭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득하고 막막한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역사를 좌지우지할 수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게 살기만 하면 될까요? 그렇게 살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살아도 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최선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삶에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스스로 역사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의 선한 도구가 되도록 최선을 다 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갑니다. 둘째, 우리에게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삶과 역사를 크게 긍정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절망적인 것이었지만 거기서 인류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의 큰 긍정을 온전히 희망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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