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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5: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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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42213 |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 15:21-28, 성령강림후 열한 번째 주일, 2017년 8월20일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의 영혼이 늘 평화로웠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과의 충돌로 인해서 긴장할 때도 많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한탄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충돌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교 고위 권력자들로부터 왔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먼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마 15:1절 이하에 따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이 머문 곳까지 찾아와서 율법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비판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사 29:13).
두로와 시돈에서
이런 충돌이 있은 뒤에 예수님은 오늘 설교 본문에 따르면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신상에 위협을 느끼면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복잡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확신으로 활동했는데 상황은 점점 더 나쁘게 변해갔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면 정의가 승리해야 하는데, 불의가 여전히 득세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불신앙이 가슴 아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은 마 15:1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당시에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절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순간에 한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에게 와서 아래와 같이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자의 외침은 많은 걸 암시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기독교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중요한 호칭이 되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아들, 즉 메시아로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아들을, 즉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이 여자의 호소는 초기 기독교에서 자주 불린 찬송가 ‘키리에 엘레이송’의 출처입니다. 이런 외침은 아무나, 모든 경우에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가능한 외침입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외침을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구질구질하다고 여깁니다. 자신들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감이 넘칩니다. 돈도 많고, 건강도 좋고, 명예도 있으니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달라는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만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또는 사이비 행복, 사이비 만족에 머물기 때문에 나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종류의 마약 중독과 비슷합니다.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불쌍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에게 자시가 처한 형편을 짤막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귀신 들렸다는 말만으로 그녀의 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정신병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처럼 의학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에도 정신병은 없어지지 않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은 정신병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 시대 자체가 정신병에 걸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증상은 한두 군데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요즘 살충제 달걀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달걀 농장에서는 닭을 생명 취급하는 게 아니라 달걀 낳은 기계 최급을 합니다. 닭은 평생 움직이기도 힘든 작은 케이지에 갇혀서 먹고 배설하고 달걀을 낳아야 합니다. 달걀을 많이 낳게 하려고 위해서 밤에도 불을 켜둡니다. 면역력이 떨어지니 농장 주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살충제를 뿌려야 합니다. 그 살충제 중에서 축적되면 사람에게도 치명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살충제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전에 유럽에서 크게 문제가 된 뒤에야 본격 조사에 들어가서 밝혀진 겁니다. 닭들에게 달걀 농장은 생지옥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해야 한다는 욕망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이념입니다. 정신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으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가나안 여자의 외침은 우리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다른 육체의 질병도 귀신 작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병은 흔했습니다. 심한 피부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성폭행을 당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건 아닐까요? 어머니는 딸의 병을 고치려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 겁니다. 무심하게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 모두 귀신에 들린 거와 같은 병을 앓습니다. 현재 건강하다고 해도 언제 어느 때 병에 걸릴지 모르고, 궁극적으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의 모든 기능이 약화됩니다. 결국 먹지도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건 훗날에 일어날 일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먼 훗날이라는 게 사실은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미리 걱정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예 생각하지 말고 지금당장 즐겁게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저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만 아직 그런 위기가 오지 않은 지금의 삶을 풍성하게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다는 이 가나안의 여자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실존입니다.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은 이 여자의 절박한 호소에 예상 외로 침묵하셨습니다.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 급해서 이 여자의 외침에 시큰둥한 것일까요? 제자들이 나서서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여기서 ‘그를 보내소서.’라는 말에는 가나안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쨌든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야박스럽게 들리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예수님의 반응이 좀 이상합니다. 가나안 여자는 자기 딸 문제로 도움을 청한 겁니다. 이 여자의 문제와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실이 배치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입니다.
뒤에서 따라오면서 외치던 가나안 여자는 제자들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겉으로 야박스러워 보이지만 이미 예수님의 진심을 알아챘는지 예수님 앞으로 나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여자에게 직접 대놓고 말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런 말은 야박스러운 정도를 지나서 모욕적으로 들립니다. 이런 모욕을 당하면 누구나 그 자리를 뜹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모욕적이냐 아니냐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처지가 딱했다는 게 하나이고, 예수님의 말보다는 예수님의 인격을 더 신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입니다. 예수라는 인격체를 가나안 여자는 알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모욕적으로 들리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자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 그런 생각이 아니고는 이런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빵을 먹을 때 빵 부스러기로 손을 닦고 마당에 던지면 개들이 먹곤 했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문현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이 여자가 더 지혜로운 말로 대꾸한 겁니다. 예수님의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황을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28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대목에서 흉악한 귀신 들렸던 딸이 즉시 나았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도 됩니다. 그녀의 딸이 혼미했던 정신이 바로 돌아오거나 열병이 치료되었을 수는 있습니다. 그건 우연일 수도 있고, 자연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가서 오늘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면서 ‘그분이 엄마의 믿음이 크다고 하면서 소원대로 된다 하셨단다. 네 병이 곧 나을 거야.’ 하고 말하면 딸의 마음도 크게 안정될 겁니다. 마음이 안정되면 병들었던 몸과 마음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앞으로 아프지 않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우리가 최선으로 건강을 지키면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아프면 그걸 안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딸이 나았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구원 능력이 이방인에게도 임한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데에 무게가 있습니다.
부스러기에 담긴 큰 믿음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강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큰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자녀와 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자녀는 이스라엘이고 개는 이방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든 것은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설교 도입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고위층으로부터의 박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으로 인해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에게서 참된 믿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실현되어야 하는데, 그런 조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로 가야 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다는 가나안 여자의 말이 비굴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비굴한 게 아니라 영성의 정곡을 찌른 말입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부스러기 영성’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주인 상에 마주 앉아서 빵 덩이를 품위 있게 먹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믿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뚫어볼 때만 가능한 영적인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에서만 영혼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수고에서, 그렇게 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그런 수고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멋진 식탁에서 소시지와 치즈와 여러 과일을 곁들여 온전한 빵 덩이를 먹고 싶지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만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은총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실제로는 은총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오늘 이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갈등을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서 새로운 종교로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유대교의 신앙적 전통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몇 상황의 변화에 의해서 유대교는 기독교를 용납할 수 없었고, 기독교 역시 그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 전통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방인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 조짐이 예수님의 공생애부터 이미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갈등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는 거부당하고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수용되었습니다.
마 8:5-13절에는 이방인을 대표하는 로마 백부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그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인 13절은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과 내용이 똑같습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백부장도 그렇고, 가나안 여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시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보다 더 컸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민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낮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스러기라도 감지덕지로 먹는다.’는 가나안 여자의 고백에 담겨 있는 영성의 진정한 품위입니다.
이런 말을 단순히 겸손과 같은 도덕적 품성으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람이 억지로 겸손할 수도 없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부스러기 영성은 하나님 경험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외침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경험하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칠 때만 가능한 영혼의 울림입니다. 끝으로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들의 삶은 ‘소원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야말로,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궁극적인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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