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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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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42922 |
이성적 예배로서의 일상
롬 12:1-8, 성령강림후 열둘째 주일, 2017년 8월27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신앙 열광주의를 넘어서
설교 제목을 정할 때 처음에는 ‘영적인 예배로서의 일상’이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예배는 설교 본문인 롬 12:1절 끝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코스’로 나옵니다. 로기코스는 영어 rational에 해당됩니다. 합리적이라거나, 또는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루터 번역은 ‘vernunftig’(페어뉜프티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 역시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영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프뉴마입니다. 프뉴마를 ‘영’으로 번역한다면 로기코스는 당연히 ‘이성적’이라는 단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영적인 예배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이성적인 예배라는 표현은 낯섭니다. 낯설 뿐만 아니라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영적이라는 말과 이성적이라는 말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어떤 사람이나 그의 말을 평가할 때 ‘이성적이야.’라고 하면 그건 영적이지 못하고 인간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반대되는 것은 아니고, 분리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곧 영적인 사람입니다. 요 4:22절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은 헬라어 프뉴마이고, 진리는 알레테이아입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서 기자들도 이미 예배를 진리와 이성의 차원에서 파악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기독교는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교리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낫게 하고, 예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들은 부동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고, 그걸 서로 분배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열광적인 행태를 많이 보였습니다. 요즘의 은사주의 운동과 비슷합니다. 구원받았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다른 것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경험한 부흥집회가 바로 이런 행태였습니다. 지금도 금요심야집회는 이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복음찬송과 흥겨운 씨씨엠을 반복해서 부릅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팔을 위로 쳐들고 흔들기도 합니다. 대중가요 콘서트 장에서 볼 수 있는 뜨거운 환호와 열기가 집회장을 달굽니다. 집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는 아무런 이성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무조건 아멘과 할렐루야로 반응할 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소소한 것들을 잊고 감정적으로 고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데 맛을 들인 사람들은 계속 그런 집회를 찾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그런 열광적 종교 행태를 자제시키려고 했습니다. 고전 14: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이성적인 예배’도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열광적인 종교 행태에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신앙과 삶의 분리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적 열정이 구체적인 삶의 문제를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열광적인 행태를 보이는 교단은 속칭 순복음교회입니다. 그 교단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에만 몰두합니다. 기복주의, 방언, 신유, 교회성장 등등이 주요 관심입니다. 기복주의가 한국 사람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탓인지 순복음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순복음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교회는 비슷한 행태를 보입니다. 그들은 경제정의와 민주화에 대해서 입을 다뭅니다. 남북 분단 문제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도 비슷합니다. 열광적인 행태가 강할수록 삶과 신앙의 분리는 더 분명해집니다. 무당들의 종교 행태를 보십시오. 악한 귀신을 쫓아내고 좋은 귀신을 불러오는 것에만 매달리지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무당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말하면 손님이 끊어질 겁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신앙과 삶의 일치를 추구했습니다.
제물로서의 삶
본문에서 바울은 이성적인 예배를 가리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물은 유대교 제사 행위와 연결됩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종교의식입니다. 실제로는 자기를 바칠 수 없으니 대신 동물을 잡아 바칩니다. 소, 양, 비둘기 등이 제물로 사용됩니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 사물입니다. 그러나 제단에 놓이면 하나님의 거룩한 것이 됩니다. 질적으로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빵과 포도주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과 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제물이 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의미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서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정체성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는 그런 제물이 될 수 있을까요? 2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살던 세상은 로마 제국이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모든 것이 나쁜 건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로마 제국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크게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교 고위 권력층이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근거한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오해한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 로마 제국은 모두가 추종해야 할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런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로마 체제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삽니다. 현실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바울이 모르지 않았습니다. 로마 체제를 완전히 부정하고 탈속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로마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거기에 길들여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도 세상 안에서 살지만 그 세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살아있는 제물로 살아가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하는 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삶에서는 대개 이 세대를 따라갑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음을 접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대통령 탄핵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보편 복지정책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이런 것들이 너무 거창한 주제라서 어렵다면 우리 일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직장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와 어떤 관계를 맺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결정해야 할 모든 것들은 다 양면성이 있는 거라서 쉽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삽니다. 그래서 열광적인 신앙행태로 빠지든지 아니면 신앙을 냉소적으로 여긴 채 살아갑니다. 양쪽 모두에게 문제는 신앙과 삶이 분열된다는 사실입니다.
은사의 단일성과 다양성
바울은 본문 롬 12:3절 이하에서 이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삶을 은사로 보았습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은사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단일성과 다양성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몸과 지체로 설명했습니다. 이 내용은 고전 12:12절 이하에서 좀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먼저 본문 롬 12:4절과 5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의 몸-지체 신학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넓게 보면 세상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확대된 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신앙 안에서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든지 밖이든지 막론하고 실제의 삶에서 바울의 이런 가르침을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라는 것보다는 다르다는 것이, 그래서 서로를 배척하려는 생각이 앞섭니다. 이 시대가 그렇게 하라고 한편으로 강요하고 다른 한편으로 유혹합니다.
궁극적으로 바울의 말은 옳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을 머리에 그려보십시오. 우선 빙하기가 바로 눈앞에 닥쳤다면 지금 원수처럼 싸우는 사람들이 공동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엄청난 화력으로 침공했다면 우리는 공동으로 대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인류가 멸종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 살충제 달걀 문제가 일어난 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모두가 생물학적으로도 공동의 운명에 처한 생명체입니다.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바울의 진술을 신앙적으로는 물론이고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라는 관점에서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각각 손이기도 하고, 발이기도 합니다. 발이 잘났다고 해서 몸으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똑같이 몸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대목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지혜롭게 생각하면서’(3절)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삶을 은사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이나 업적에 도취해서 잘난 척하지 않고, 남에게 앞서지 못한다고 해서 주눅 들지도 않고 겸손하게 자기의 분수를 지키면서 즐겁게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삶의 태도와는 크게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무능력하다는 핀잔을 듣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욕망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를 경쟁의 대상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구샘터교회는 이를 극복하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교우들은 저와 똑같이 우리의 분수에 맞는 교회를 꾸려가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 교회가 더 커지지 않는 것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 모습을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저에게 이런 정도의 카리스마를 허락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은사의 존재론적 깊이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삶의 태도가 소극적인 것으로 비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사로서의 삶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삶이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는 데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가장 적극적인 것입니다. 대형마트를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합니다. 대표도 있고, 청소원도 있고, 맛보기 먹을거리를 현장에서 만드는 사람도 있고, 계산대 앞에서 일하는 케셔도 있습니다. 이들의 일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카리스마라고 한다면 모두 똑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누구도 무시당할 수 없습니다. 무시당하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여러 방식으로 투쟁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연봉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갑과 을의 관계를 완전히 해소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이 카리스마라는 사실을 근본에 놓고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할 용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삶을 은사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소극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에서 정말 중요한 관점은 다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만 바울이 이성적인 예배라고 표현한 신앙과 삶의 일치가 확보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6절 이하에서 교회 안에서의 카리스마를 열거합니다. 예언, 봉사, 가르침, 위로, 구제 등등입니다. 그런 일들을 흔들림 없이, 그리고 행복하게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8절만 읽겠습니다.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기에 열거된 교회의 카리스마를 세상의 카리스마로 바꿔보십시오. 교사, 시민운동가, 정치인, 의사, 법조인, 벽돌 쌓는 사람, 택시 기사, 파출부, 은행원 등등이 다 해당됩니다. 자기의 일을 카리스마로 여기는 사람은 성실함과 부지런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행해야 합니다. 은사의 존재론적 깊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기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 것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삶이 가능합니다. 대통령도 성실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해야 하고, 청소부들도 성실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일들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직업의 차이는 없어지고, 모두 행복하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그건 신학적이고 문학적인 이상일 뿐이지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이에 관해서 저는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현실은 달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아예 기독교 신앙을 종교 교양쯤으로 대하고 실제로는 현실의 척박한 논리에 따라서 살면 됩니다. 그게 바울이 경계한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신자들에게 ‘이성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2천년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러분의 일상에서 이성적인 예배가 드려지기를, 그래서 삶이 거룩한 축제로 경험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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