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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6:2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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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43586 |
십자가와 생명
마 16:21-28, 창조절 첫째 주일, 2017년 9월3일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의 고난 문제
예수님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몇 번에 걸쳐서 예고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앞 구절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될 텐데, 거기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뒤에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베드로의 반응이 이상해보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 당하는 일은 당연히 말려야 하지만,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니까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진술은 호 6:2절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여기서 이틀 후와 셋째 날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히 쓰는 관용어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삼일 후’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성전 창기인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고멜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호세아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호 6:2절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제의 부활로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포악한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해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운명을 강력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부드럽게 충고한 게 아니라 다른 경우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2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 즉 예수님으로 하여금 시험에 들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한 표현은 복음서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을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마귀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마 4:1-11절에 마귀가 예수에게 나타나서 세 가지 요구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봐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줄 것이다. 마 4장에 나오는 마귀의 말과 오늘 본문 마 16:21절 이하에 나오는 베드로의 말은 모두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 솔깃한 말입니다. 요즘 말로 쉽게 바꾸면,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세상에서 성공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사탄과 마귀의 일입니다. 사탄과 마귀의 요구는 늘 그럴듯합니다. 이런 성공주의가 표면적으로 세련되어 보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생각과 요구는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일은 가능한대로 힘든 것과 골치 아픈 것을 피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를 아무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무시하지 못한 세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해도 뭔가 힘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봐도 이런 생각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현실적인 생각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마 6:31-33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저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말씀은 너무 과격하고,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립니다. 어떻게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삶에 대한 생각을, 즉 생명의 근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실 때 회개하라고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을 전환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은 공허한 것으로 들립니다.
생명 얻음과 잃음
생각의 완전한 전환에 대한 설명이 오늘 설교 본문 24절부터 나옵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죽음에 더 가까운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체제와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적당한 예가 없어서 ‘여호와의 증인’을 예로 들겠습니다. 그들은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따르겠다는 심정으로 군대에 가는 대신에 사회 시설에서 군복무 기간보다 더 길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대체복무 제도입니다. 그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합법화되지 않았습니다. 부끄럽게도 이들의 주장을 앞장서서 반대하는 이들은 주로 보수 기독교 단체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속한 많은 남자 청년들은 이 문제로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로마 제국 안에서 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실제적인 삶의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제자로 남았던 이유는 그들이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선택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확실하게 짚어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산다고 해서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스펙이 쌓이는 것도 아니고 무병장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운명 자체가 고난과 십자가였으니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의 죽음은 실제로 삶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가능하면 그런 운명을 피해보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예수님을 통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세상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생명과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죽어 천당 가서 영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사는 것을 가리킬까요?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심판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심판자는 생명을 결정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걸 ‘인자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27,28절에서 반복하여 인자(人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인자는 세상 심판자를 가리키는 묵시사상 용어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은 생명이 온전하게 발현되는 사건입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즉 종말이 오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만을 생명이라고 여긴다면 생명 심판자인 인자가 생명을 줄 것이라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관념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 믿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겁니다. 우리 삶의 심연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재물과 건강과 명예와 자랑으로 우리 삶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곧 생명의 다른 차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는 삼십대 초반의 나이로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내리는 빌라도는 늘그막까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습니다. 누가 더 생명의 본질에 가깝게 산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명을 더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현대인들은 그런 경향이 더 강합니다. 자연과학이 생명의 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과학만이 아닙니다. 경제발전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생각도 만연해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인가 하는 염려만이 현대인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추세를 추종하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목표를 성취하려고 한다는 점만 다릅니다. 이런 데에 머물러 있으면 인자가 우리의 생명을 심판한다는 말은 잠꼬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의 생명 경험
인자가 심판주로 올 종말에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오늘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질문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인 마 16:28절은 바로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의 재림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곧 재림하신다는 뜻일까요? ‘왕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나라’를 가리키는 ‘바실레이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마 4:17절에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입니다. 마 6:9-13절에 ‘주기도’가 나옵니다. 10절에 나오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에서 그 나라가 바로 ‘바실레이아’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배경으로 놓고 본다면 28절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서 경험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경험이 곧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줄곧 붙들고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무너지는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악한 사람이 잘 되기도 합니다. 곳곳에서 정의와 평화가 파괴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정의와 평화를 파괴하는 가장 큰 세력은 바벨론이었습니다. 바벨론은 너무 막강한 세력이기에 그 어떤 저항을 통해서도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바벨론은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자가 바로 인자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정의롭고 평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에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선포가 고대 선지자들의 선포와 다른 점입니다. 그걸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했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을까요?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마지막 심판의 순간이 오기 전인 지금 여기서 생명을 얻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영적 통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분명한 현실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집 마당의 석류나무에 올해는 석류가 제법 많이 달렸습니다. 동네 개구쟁이 어린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고 가정하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석류가 보이니? 색깔이 예쁘지? 저 안에 보석이 수백 개나 들어 있단다. 정말 멋있는 석류다.’ 이렇게 말하면 아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나님 나라도 석류 속의 씨앗처럼 비밀스럽게 숨어 있습니다. 석류를 당장 쪼개지 않아도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여전히 로마 제국이 강압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거는 하나님 나라가 로마 정치나 경제와 사회에 의해서 제한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아무리 엄혹한 현실 앞에서도 해방과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벌어지는 상거래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고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라는 율법에 저항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가 그의 영혼에서 가장 분명한 현실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고한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체포당하고 심문당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와 일치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여기에 와 있는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믿음의 전통에서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 뭔가 불편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당신과 똑같은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세상에서 각자가 감당할만한 십자가를 지면 됩니다. 혹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도 역시 저절로 알게 됩니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갈증이 있는 사람이 물을 찾게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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