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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02 추천 수 0 2017.10.17 23: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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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8:21-3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4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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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능력과 기술

마 18:21-35, 창조절 셋째 주일, 2017년 9월17일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에 대한 문제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가지가지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람 관계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벌어집니다. 교회도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들만 모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들끼리 서로 상처받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본문 마 18:21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일곱 번을 용서하는 것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어려울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우리말에 삼세번이 있듯이 세 번까지는 용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유대인들도 대충 그런 정도의 숫자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따라서 숫자는 달라질 겁니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는 용서가 수없이 반복됩니다. 부부사이에는 숫자가 줄어듭니다. 남과의 관계에서는 더 줄어듭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법 괜찮지 않으냐는 뜻으로 예수님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완전히 어긋나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도 힘든 마당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어도단입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하면 490번이 됩니다. 이것은 용서해야 할 숫자를 가리키기보다는 용서의 무한정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끝없이 용서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도 실제로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무한정의 용서가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푸는 만능의 열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한 것에 합당한 책임을 묻는 것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하늘나라 비유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이어서 ‘하늘나라’(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는 다른 곳에도 많이 나옵니다. 마 13장에는 씨 뿌리는 비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 진주 장사꾼의 비유, 물고기와 그물의 비유 등이 나옵니다. 모두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인 마 18장에 나오는 비유 역시 이와의 연장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종들과 결산하려던 어떤 임금과 같다는 말로 비유가 시작됩니다. 임금과 종의 관계가 이야기의 토대입니다. 종은 원래 주인인 임금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결산할 게 따로 있지 않습니다. 이 상황은 그런 일반적인 임금과 종의 관계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과 모종의 계약을 맺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계약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결산을 해야 합니다. 이 종은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당시 유대 지역을 통치하던 헤롯왕의 일 년 전체 수입이 9백 달란트였고, 갈릴리와 베뢰아가 거둬들인 지방세 1년 치가 2백 달란트였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대구의 일 년 예산보다 더 많은 셈입니다. 임금은 종과 가족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은 엎드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시라. 나중에라도 벌어서 갚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빚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들립니다. 다음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감옥에 갇힐 신세를 겨우 면한 이 사람이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는 동료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동료는 조금만 여유를 주면 갚겠다고 사정했습니다. 이 사람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동료를 고발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이 사람의 행동거지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갑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일만 달란트의 ‘50만분의 1’에 해당됩니다. 비교가 되지 않는 액수입니다. 최소한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동료의 빚도 탕감 해주었어만 합니다. 자신이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남이 자기에게 잘못한 것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임금은 이 사람을 다시 불러서 엄하게 책망했습니다. 32,33절입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 비유의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늘나라는 앞에 나온 490번이라는 숫자와 일만 달란트라는 금액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무한정의 용서이자 사랑입니다. 둘째, 사람은 그것을 외면한 채 인색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뚫어본다면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우선 우리가 왜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일까요?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입장한 여행객입니다. 여기에 들어오려면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입장료가 얼마일지요. 금액으로 따지기가 불가능합니다. 우주에 많은 별이 있고, 행성이 있는데 지구처럼 생명 현상이 가득한 행성은 찾기 힘듭니다. 비슷한 행성 우주 어딘가에 있다 하더라도 너무 멀어서 갈 수도 없습니다. 우주 물리학자들이 우주선을 타고 1개월 안에 다다를 수 있는 곳에서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발견하고 여행객을 모집한다고 합시다. 세계 거부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낸다하더라도 가보고 싶을 겁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이 찬란하게 빛나는 지구의 모든 것을 공짜로 구경할 수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있는 지구의 산소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엄청난 액수일 겁니다. 색맹인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구에서 벌어지는 색깔 현상도 놀랍습니다. 그걸 돈 한 푼 내지 않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지구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놀라운 현상에 감동 받고 그걸 즐기는 것은 당연하지만 빚진 거로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각자 자유입니다. 그걸 빚의 탕감으로 여기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면 본문 비유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모질게 대하다가 주인에게 불림을 당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았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더 명백해집니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모든 죄에서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만(솔라 피데)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니 죄는 곧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이건 실증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면서 살아가지만 이것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것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성취해도 우리의 내면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보다 좀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았다 하더라도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이런 운명을 가리켜 기독교는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종교적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인간과 세계를 정확하게 뚫어본 통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유대교는 죄로 인한 생명 상실로부터 해방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그들에게서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유대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종교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문명사회는 본질적으로 율법적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끌만한 매력이 있습니다. 성취감과 만족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봉을 많이 받으려고 최선을 다 합니다. 그게 실패하면 실망합니다. 가난한 북한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 나라이고, 부자로 사는 우리는 율법을 잘 지킨 나라입니다. 율법과 문명과 인간의 모든 업적과 성취는 그것 나름으로 가치가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생명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여기 50대, 60대 되는 분들은 실감할 겁니다. 그들이 젊었을 때에 비해서 지금은 경제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고, 정치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화되었으나 삶의 질에서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땀 흘려서 일정한 부를 축적했으나 결국 아무 것도 손에 넣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을 나이에 이른 거와 비슷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사람의 운명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이상 율법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생명의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것과 같습니다.

 

용서의 능력


저는 일만 달란트 빚의 탕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실제의 인생살이에서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고 사랑받은 사람만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지구에 손님으로 초청받아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살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과 하나를 이루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감옥으로 끌고 갈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더 나가서 주기도문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라.’고 기도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가장 초보적이고 원칙적인 가르침이 현실에서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하심과 사랑을 경험하면 실제로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을 뛰어넘어 490번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적인 용서 문제는 차원이 다릅니다. 내가 어느 누구를 개인적으로 용서할 수 있지만 그것이 늘 옳은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에 사기꾼이 등장했다고 합시다. 대상이 일반 신자일 수도 있고 목사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개 집사가 1천만 원을 사기 당했습니다. 믿음으로 혼자서 용서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조치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이런 문제가 마태공동체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대목인 마 18:15-20절에 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형제가 잘못하면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서 조치해야 합니다. 1)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서 권면합니다. 2) 두세 증인을 데리고 가서 충고합니다. 3) 교회에 공개해서 교회 대표자가 그를 치리하게 합니다. 4)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겨야 합니다. 괜찮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이 대목에서는 일곱 번 용서하라거나 490번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살리는 차원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게 용서의 기술이자 방법입니다.


이런 기술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됩니다. 서로 피곤하게 만드는 관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그런 일들이 발생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가족관계에서 일어납니다. 특히 여자 분들이 시댁에서 그런 일을 많이 당합니다. 이것도 보는 관점에서 따라서 또 평가가 달라질 겁니다. 안방에 들어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들어가면 며느리 말이 옳습니다. 그런 걸 일일이 다 따지기를 힘듭니다. 서로 노력하다가 용서가 안 되면, 즉 화해가 안 되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는 게 최선입니다. 서로 간에 접촉하는 기회를 줄이는 게 좋고, 그게 안 된다면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면 되지 굳이 ‘용서 해야지, 그리고 사랑해야지.’ 하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날 정도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좋은 관계만 맺고 살아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힘든 관계로 인생을 소모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자학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학이고, 생명의 왜곡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용서라는 말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영화 <밀양>이 그걸 주제로 합니다. 피아노 원장인 이신애로 분한 전도연은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카센터 사장인 김종찬 역은 송강호가 맡았습니다. 이신애는 딸의 살해범 주산학원 원장을 기독교 신앙으로 용서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감옥으로 찾아갑니다. 살해범은 이미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 받아 마음이 평화롭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도 용서하신다고 태연스럽게 말합니다. 이신애는 결국 용서하지 못합니다. 가해자는 종교의 이름으로 영혼의 평화를 느끼고 피해자는 괴로움을 당합니다. 이게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용서는 아닙니다. 독일은 나치 시대에 벌어진 사건의 책임자들을 준엄하게 처벌했고, 이스라엘을 비롯해서 주변 나라에게 반복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돈 몇 푼 던져주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지난 정부는 이걸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경솔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본의 행태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용서하라는 것은 신앙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를 동원해서 수많은 이들을 살상한 책임자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는 마당에 어떻게 용서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다 묻어두고 미래만 생각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며, 원수에 대한 앙갚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원수 갚는 문제를 사적인 것으로 다루지 말고 공적으로 다루라는 것이지 기계적인 용서가 능사라는 것은 아닙니다. 충고하고 책임을 묻고 사법적인 처리를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그래서도 돌아서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하나님이 탕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깨우침이야말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용서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능력은 용서의 기술과 방법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휩싸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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