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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20년 전 이맘때, 20년 뒤 이맘때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정부는 심각한 외환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21일 밤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20년 전, 이맘때였다. 캉드쉬 IMF 총재가 한국에 왔고, 1997년 12월3일 김영삼 정부와 IMF 간 협상이 타결됐다. ‘IMF체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주류 학계나 언론들은, 1997년 7월 태국발 동남아 외환위기라는 외부 요인과 재벌 중심 경제, 방만한 차입경영과 관치금융, 부정부패, 대립적 노사관계 등 내부 요인이 결합, ‘IMF체제’가 왔다 했다.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급속 추진되었으나 노동계나 시민사회의 저항도 만만찮았다. 경제 및 사회의 개혁이라는 명분에 이견은 없었지만, 과연 어떤 방향과 내용으로 바꿀지에 대해선 시각차가 컸다.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자본 진영은 이윤을 위한 여건 개선 시 온 사회가 득을 본다 했고, 노동 진영은 노동조건과 삶의 질을 개선해야 나라도 번영한다 했다. 그러나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IMF체제’에 발목이 잡혀 어정쩡하게 정리해고제 및 근로자파견제 도입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집행했다. 2003년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 역시 출범 전과 달리 자본과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다 결국 신자유주의 물결에 쉬이 휘말렸다.
<쇼크 독트린>을 쓴 나오미 클라인은 1997년 말에 들이닥친 한국의 외환위기를 “충격요법”이라 했다. 즉 미국 월가로 상징되는 세계금융자본이 인위적으로 한국 등 아시아 국가의 금융시장을 붕괴시켜 세계금융시장으로 편입시켰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세계금융자본의 눈엔 한편으로 한국의 갑갑한 국가-재벌 동맹체가, 다른 편으로 1987년 대투쟁 이후의민주노동운동이 완전한 신자유주의 구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가와 세계자본 세력에는 ‘국가 부도’라는 사상 초유의 충격이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킬 무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한국은 IMF 및 선진 각국으로부터 수백억달러를 빌려와 부도를 막는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즉 자본시장 개방, 국가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그리고 노동 유연화 및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대통령 김대중은, 미국 역사학자 B 커밍스가 “IMF의 서울지부장”이라 평할 정도로 IMF식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아마 (세계자본주의의 관리자) IMF 및 (무한 이윤 추구자) 세계금융자본의 입장에선,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1995년에 창립된 민주노총과 더불어 기존의 ‘국가-재벌 동맹체’ 대신 ‘국가-노동 동맹체’를 건설하면, 자본의 돈벌이 조건이 악화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국가 부도’라는 충격요법은 효과적이었고, ‘제2의 경술국치’나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상징되듯 애국주의 프레임이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우리가 경험한 바, (자본과 시장을 위해 온 자원을 동원하는) 신자유주의는, 민주·보수 정부와 무관하게 정치·경제, 교육·문화 등 사회 전반을 황폐화했다. 그 와중에 극우보수는 민주정권에 비해 더욱 부패, 타락하여 마침내 ‘사자방 비리’ 또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불러 (1년 전 시작된) 촛불혁명으로 추락했다. 현재 우리는 직장인 85% 이상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의 시간 속에, 최고의 청년실업, 최저의 출산율, 최고의 산재, 최저의 행복도로 산다. ‘IMF 트라우마’의 결과다.
생각건대, 20년 전 우리가 ‘IMF체제’에 빠졌던 역사를 냉정히 성찰하지 않으면 촛불혁명에도 불구, 향후 20년 뒤 한국 사회는 더 비참해진다. 내 생각은 이렇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는 자본에는 두려움의 원천이었지만 민초들에겐 인간다운 삶을 향한 집합적 열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985년부터 1996년까지 10여년 경제성장률은 최고조였다. 바로 그 무렵 우리는 더 이상 자본과 정권을 위한 구조개혁이 아니라 민주와 복지를 위한 구조혁신이 필요했다. 즉 들끓는 민중의 열기를 등에 업고 두려움을 넘어 개발 독재 시절 구축된 국가-재벌 동맹체를 타파, 민주-생명 공동체를 창조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가 지난 20년 이상 지체되었기에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프다. 20년 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더불어 웃는 사회가 되려면, 지금부터 삶의 프레임을 제대로 바꿔야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함께 나서야 하지 않나?
경향신문 201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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