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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21: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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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2142) |
밤을 이기는 4대 지혜 (이사야 21장 11-17절)
< 인생의 밤도 필요합니다 >
1958년 중국의 모택동은 6·25 전쟁 참전 후 어려워진 경제를 회복하려고 <대약진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때 벼 낱알을 쪼아 먹는 참새를 쥐, 파리, 모기와 함께 유해 생물로 지정해 거의 박멸시켰지만 참새라는 천적이 급감하자 해충이 급증해서 오히려 농작물 수확이 급감했습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쳐 2천만 명 이상 굶어죽은 후 대약진 운동을 포기했는데 당시 중국내 사망자 숫자는 1차 세계대전 사망자 숫자보다 많았습니다.
약진의 꿈은 어떤 것의 말살을 통한 전체주의적 방법으로는 장기적으로 이뤄지기 힘듭니다. 전체주의의 효과는 대개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가 되자.”는 구호가 전체주의의 수단이 되면 안 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좋지만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인 하나보다는 죄악이 아니면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면서 하나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보다 둘로 있는 것이 더 좋은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둘로 있으면서 하나 되기를 지향하면 됩니다. 파괴적인 분열은 나쁜 것이지만 창조적인 분립은 좋은 것입니다.
둘이 되는 것이 악이고 하나 되는 것이 선이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둘이 되어 선한 것도 많고 하나가 되어 악한 것도 많습니다. 계속 하나 되려고 해서 대형화되기만 하면 좋을까요? 현실적으로 대형교회가 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형교회는 선하고 긍정적인 요소도 많지만 악하고 부정적인 요소도 많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큰 상태에서 하나가 되려면 개별적인 것이 희생을 넘어 말살까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명한 리더는 비전을 따라 커지기를 추구하면서 나눔을 통해 작아지기도 추구하는 것입니다.
왜 커지기를 추구합니까? 큰 힘으로 해야 할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작아지기를 추구합니까? 큰 힘이 전체주의로 흐르면 장기적으로는 퇴보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 되지 않고 하나 되는 것이 삶의 질과 행복의 질을 높이는 데 더 유용합니다. 그래서 “하나 되자!”는 말이 반대나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정치적인 구호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외적으로 하나가 된 것 같은 독재국가가 오히려 삶의 질과 행복의 질이 낮습니다. 삶의 질과 행복의 질을 높이려면 리더십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마이너 그룹을 인정해야 합니다.
경직성보다 유연성이 장기적인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인간 사회에 완벽한 선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잠깐은 선의 상태가 이뤄질 수 있어도 영원히 그 상태가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악을 보면서 얻는 교훈도 있습니다. 선이 정면교사가 되어 거악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악이 반면교사가 되어 거악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낮과 같은 환경만 있게 하시지 않고 밤과 같은 환경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살면서 고난이 없으면 좋겠지만 고난이 있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십시오. 고난이 있어야 성숙함도 얻게 되고 희생이 있어야 진리도 다가오게 됩니다. 고난과 희생의 바탕 위에서 인생은 더욱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고난을 잘 극복하면 고상함을 얻고 내상을 잘 극복하면 거룩한 내성을 얻습니다. 고난 중에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고난의 밤을 어떻게 잘 이겨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잘 이겨내면 고난은 축복의 산실이 됩니다.
< 밤을 이기는 4대 지혜 >
어떻게 고난의 밤을 잘 이겨낼 수 있을까요? 본문에 나오는 에돔과 아라비아의 심판 예언을 통해 밤을 이기는 4대 지혜를 교훈 받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약속을 의지하십시오
세일에서 선지자를 불러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반복해서 물었듯이(11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왜 이 밤이 오게 되었습니까? 밤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 밤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설명을 추구하는 것보다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은 일이 나중에 이해될 때도 많습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를 했는데 현실이 나아지지 않아도 “왜?”라고 묻지 말고 계속 봉사하십시오. 힘든 현실 속에서 선한 결단과 행동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고 약속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면 그때 많은 사람들은 묻습니다. “목사님! 왜 그런 사랑스런 아이가 어려서 죽어야 합니까? 왜 내 자녀가 그런 고통에 처해야 합니까? 왜 그토록 좋았던 우리 관계가 제3자 때문에 깨져야 합니까?” 그러나 진짜 중요한 질문은 “왜?”라는 수동적인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능동적인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 문제에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때 믿음과 헌신과 감사를 포기하지 말고 약속을 의지하십시오.
고난으로 인해 너무 낙심하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제일 삼가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면서 신세타령과 팔자타령을 질문에 섞는 것입니다. 타령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가까이하거나 돕고 싶은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어려워도 당당하게 사는 사람에게 감동을 느끼고 더 돕고 싶어 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신세타령을 하지 마십시오. 힘들어도 변함없이 약속을 의지하고 감사할 때 고난의 밤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2. 회개를 앞세우십시오
세일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선지자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본문 12절에서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는 말은 “살면서 아침이 있으면 밤도 있고 밤이 있으면 아침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에 아침만 있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인생에는 밤도 있어야 합니다. 별은 밤이 되어야 보입니다. 밤에 보이는 깊은 진리가 낮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인간적인 빛 가운데서 혼자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둠 속에 처할 때 생기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인 불을 켜려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켠 촛불이나 횃불이 소용없을 때도 얼마나 많습니까? 보통은 빛이 어둠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어둠은 인간적인 촛불이나 횃불과 같은 빛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촛불과 횃불이 자기 인생과 세상을 태우기도 합니다. 밤에 해야 할 일은 밤의 원인을 찾고 밤의 기한에 대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밤의 고난은 ‘회개를 도전하는 확성기 소리’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거나 기독교 반대 세력이 늘어나는 것도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입니다. 이제까지 교회는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 예수님을 믿으라!”고 소리쳤지만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회개하라! 예수님을 믿으려면 바로 믿으라!”고 소리칩니다. 그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자신의 죄와 허물과 약함을 고백하는 회개는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이끌어내는 최선의 수단입니다.
3.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본문 13절에 언급된 ‘드단 대상’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사막을 횡단하며 장사하던 상인들을 뜻합니다. 그들이 아라비아 수풀에서 유숙한다는 말은 전쟁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13절). ‘데마 땅’은 아라비아 북부 지역 땅입니다. 그 땅 사람들에게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도피하는 자에게 떡을 주어 영접하라.”고 한 것은 이웃 사랑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14절). 고난의 밤에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풀려고 하십시오. 그러면 밤은 크게 단축됩니다.
인도에 비노바 바베라는 선각자는 ‘사랑과 나눔’이 사회 문제의 근본 해결책임을 깨닫고 1951년부터 토지헌납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는 인도 전역을 걸어 다니며 부유한 지주들을 만나 땅의 기부를 촉구하면서 인도인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바베는 나눔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절대 평등을 원하지 않고 다섯 손가락 정도의 평등을 원합니다. 손가락을 보면 가장 작은 손가락이 한 치밖에 안 되고 가장 긴 손가락은 한 자나 되는 그런 불평등한 모습은 없습니다. 절대 평등은 아니라도 지나친 불평등은 없어야 합니다.”
손가락들은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자기만의 특징을 잘 살려서 위대한 인간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손가락들의 협력정신을 앞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을 외면하고 자기만 사랑하는 것’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지만 ‘남을 살피면서 자기만큼 사랑하는 것’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나눔의 결핍은 마음의 결핍을 낳고 밤을 부정적인 밤으로 지속시키지만 나눔의 풍요는 마음의 풍요를 낳고 밤을 창조적인 밤으로 만듭니다.
4. 더욱 겸손해지십시오
게달 자손은 상거래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지만 선지자는 곧 그들의 부와 영광이 사라지고 활을 잘 쏘는 게달의 용사가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패망한다고 선포합니다(16-17절). 이 말씀은 겸손의 중요성을 도전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에 대한 좋은 셀프 이미지를 가지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남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재능을 사실대로 적절하게 알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내가 최고다.”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로 멀어집니다.
잠언 29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교만하면 칭송과 명예 대신 수치와 경멸만 얻습니다. 교만은 얻으려는 것을 잃게 만들고 영혼과 정신까지 파괴합니다. 교만은 기도응답을 막지만 겸손을 기도응답을 촉진합니다. 기적과 은사와 재능을 자랑하지 말고 은혜도 자랑하지 말고 더 나아가 겸손도 자랑하지 마십시오. 겸손을 자랑하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지금 잘 나아가도 하나님을 삼의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제 삶의 중심이 되소서! 이 일은 혼자 처리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소서.”라고 해야 은혜 위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모든 불행, 걱정, 염려, 두려움은 대개 교만을 통해 생기고 겸손을 통해 사라집니다. 교만은 실패를 낳고 겸손은 성공을 낳습니다. 겸손하면 고난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변하고 결국 부활의 열매를 얻게 되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넘치게 보상하시는 하나님 >
살면서 힘든 고난의 밤이 다가와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고난이 죄 때문에 주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동방의 의인 욥도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10명의 자녀가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내도 나가 죽으라고 욕했고 친구들도 은근히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최후에 그는 회개하고 하나님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그는 의인이었지만 고난을 회개 기회로 활용하고 낮아지는 계기로 삼아 결국 두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성도에게 고난을 있게 하시지 않습니다. 신실한 믿음과 감사를 통해 넘치게 보상하시려고 그 고난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즉 두 배 이상의 성숙과 축복, 부흥과 승리, 영광과 능력, 그리고 선교와 나눔을 위해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순간을 믿음과 감사로 잘 극복하면 마침내 사업도 두 배 이상의 성공적인 사업으로 돌려주시고, 자녀도 두 배 이상의 성숙한 자녀로 돌려주시고, 잃어버린 물질도 두 배 이상으로 돌려주시고 추락한 명예도 두 배 이상으로 높여주실 것입니다.
가정과 일터와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성경의 욥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개 성도님! 곧 두 배 이상의 축복이 다가올 것입니다. 계속 믿고 감사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천사도 거룩한 치어리더처럼 “두 배! 두 배!”라고 하면서 소리 없는 소리로 응원해줄 것입니다. 두 배 이상으로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입술로 끊임없이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현재 힘든 상황이라도 그 상황이 끝이 아닙니다. 성도의 고난은 후퇴하게 하는 셋백(set back) 상황이 아니라 올라서게 하는 셋업(set up) 상황입니다.
현재의 자리도 영원한 자리가 아닙니다. 지금 자리는 잠깐 지나가는 자리입니다. 더 좋은 자리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이 완전히 통제하는 상황입니다. 사업에서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었어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고 입술에 불평과 원망을 삼가면 사업에서 두 배 이상으로 성공하거나 월급을 두 배 이상으로 받는 직장으로 옮겨주실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없어도 감사를 잃지 마십시오.
친구를 잃었습니까? 불평과 원망이 없이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으면 두 배 이상으로 좋은 친구가 생길 것입니다. 누가 배신하고 차버리고 떠나면 잠시 낙심되지만 그때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마십시오. 그가 스스로 떠난 것이라도 결과적으로는 그가 필요하지 않기에 하나님이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 현재는 마음이 아파 견디기 힘들지만 그때도 믿음과 감사를 잃지 않으면 그 일을 계기로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로운 축복이 펼쳐질 것입니다. 살다보면 수시로 고난의 밤이 찾아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더욱 가까이하심을 믿으십시오.
밤에 아이를 재울 때 불을 끄면 아빠가 보이지 않으니까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지금 곁에 있어요?” 그때 아빠가 말합니다. “그럼. 지금 너를 보고 있단다.” 하나님도 어둠 속에서 더욱 우리를 보고 계실 것입니다. 고난의 밤에 더욱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내 탓이요!”라고 하면서 회개를 앞세우고, 구체적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더욱 겸손하게 행함으로 밤을 지키고 이겨내는 거룩한 파수꾼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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