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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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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50863 |
왜 복음인가?
롬 1:8-17,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주일, 2017년 10월29일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 시대
지금부터 500년 전인 16세기 초의 유럽은 르네상스(문예부흥) 시대입니다. 회화와 조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들은 세 명입니다. 미켈란젤로(1475~1564)는 1508-1512년에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천지창조’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고, 1534-1541년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제목으로 시스티나 제단 벽화를 그렸습니다. 젊어 죽은 라파엘로(1483-1520)는 바티칸 궁 서명실 벽화 ‘아테네 학당’을 1509-1510년에 그렸습니다.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최후의 만찬’을 1495-1497년에 그리고, 1503-1506년에 피렌체에서 ‘모나리자’를 그리는 등, 마지막까지 다방면에서 활동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19년에 죽었습니다. 1513-1521년에 교황으로 제직하던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레오 10세입니다. 그는 학문과 미술을 장려하고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든 사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예술적이고 사치스럽게 살았던 교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티칸 재정이 바닥이 나자 그는 면죄부를 팔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16세기 초는 바티칸 궁이 최고로 잘 나가던 시절입니다.
당시 유럽의 변방에 속한 비텐베르크 교회의 사제이며 그 대학교 교수인 마틴 루터는 로마 바티칸 궁에서 명예와 권력과 부와 예술과 학문을 구가하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루터는 22세가 된 1505년에 그 어느 수도회보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영혼 구원 문제에 매달렸는지는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여놓은 95개 신학논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영혼의 구원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허무맹랑한 거짓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비판했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95개 신학논제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면죄부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 절대권에 대한 비판입니다. 한 마디로 교황을 향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21번째의 신학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젊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가르친 과목은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입니다. 성경연구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기록한 롬 1:16,17절은 그로 하여금 천지가 진동할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런 경험은 일생에 몇 번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공동번역으로 이 두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16.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17.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복음에 대해
바울은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고 말합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로마에 들려서 그곳 교인들에게 전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의 복음(유앙겔리온)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여기에 폐암이나 간암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복음은 좋은 집을 구입했다거나 자신이나 자식이 좋은 직장에 들어간 이야기가 아니라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암에 걸리지 않은 사람에게는 물론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전혀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문제는 암에 걸렸는데도 그 사실을 모르고 다른 것에 정신을 파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복음으로 인식하려면 자신의 실존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당시에 복음이라 자처하는 다른 두 세계와 대립합니다. 하나는 유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 로마 문명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의 율법 전통은 역사가 깊습니다. 그 내용은 주로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압축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대로만 산다면 개인과 사회는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율법을 강조해도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으며, 그걸 지킨다고 해도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에 율법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짐이 바로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이 짐인 이유는 율법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순기능은 인간이 율법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의 헬라 로마 문명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이었습니다. 인간의 온갖 지혜가 축적된 것이니 당연히 그렇게 보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 예술, 토목, 법, 과학 등등, 일체의 유럽 문명이 헬라 로마 시대에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 전통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 경기장은 오늘날 건축과 스포츠의 원형입니다. 로마의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구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마의 평화’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입니다. 이 둘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서 지금의 고속도로나 고속철이라 할 수 있는 도로를 닦았습니다. 모든 길은 물론 로마와의 왕래를 쉽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지중에 연안에 모든 사람들은 헬라 로마 문명이야말로 생명을 제공하는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과 거기서 벌어지는 문명을 복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좋게 사용될 수도 있고 나쁘게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제국은 역사와 더불어서 없어집니다. 그것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제국의 몰락과 함께 자신도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대한 역사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 순간 제국은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평화를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할 때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파괴합니다. 로마는 자신들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십자가 처형이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로마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은 일벌백계의 차원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인 십자가형을 내리는 겁니다. 그 법에 의해서 예수는 죽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 권력에 의해서 배척당하고 로마 총독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관한 이야기야말로 참된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광신자의 허튼소리였을까요? 몽상가의 비현실적인 독백일까요? 주류로부터 주변부로 밀려난 자의 자기변명일까요? 예수 이야기가 왜 복음일까요?
뒤나미스 데우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뒤나미스 데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 능력을 돈, 권력, 업적, 소유 등에서 찾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건 분명합니다. 이런 것과 비교할 때 복음은 초라합니다. 앞에서 복음과 대립하는 세력이 유대교와 헬라 로마 권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을 생명의 능력, 즉 구원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운명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능력의 표본입니다. 바울은 당시의 그런 상황을 고전 1:22-24에서 정확하게 피력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솔직하게 우리의 삶과 세상을 봅시다. 예수 믿는다고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 밥과 떡에 관계되는 힘들은 예수 믿는 거와 상관없이 작동됩니다. 예수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생각을 완전히 돌려야 합니다. 케제만(E. Kasemann)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복음은 ...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능력의 현현이다.’(국제성서주석, 로마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능력을 받아들여야만 예수 이야기가 복음이라는 바울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겁니다. 개인의 한 평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죽을 때 행복한 게 좋을까요, 아니면 살아있을 때 행복한 게 좋을까요? 두 가지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대다수 사람들은 당연히 행복하게 죽는 걸 원할 겁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능력은 우리의 생명을 마지막에, 즉 궁극적인 차원에서 완성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종말이라는 말이 너무 거리가 멀어서 실감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먹고 살기도 바쁘고 골치 아프고,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게 사는 것만 해도 충분하기에 종말 운운은 비현실적이라는 겁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걸 일상적으로 실감합니다. 죽음이 바로 앞에 들이닥쳤다는 사실을 리얼하게 경험합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의 고유한 능력으로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제야 그 완성된 삶을 지금 여기서 선취의 방식으로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디카이오수네 데우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17a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수네 데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라는 말을 명심하십시오. 따지고 보면 인간의 모든 삶은 의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우등생이라는 사실을 인정받으려는 데에 있습니다. 연봉도 그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척도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크기도 목사가 인정받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인정받으면 자신이 뭔가를 이뤘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바울의 말은 그런 것과 다릅니다. 공동번역 성경이 잘 번역해놓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곧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간의 고상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삶과 선한 행위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의미 있는 실제의 삶은 사라지고 말로만 믿는다고 하거나 종교적인 자기도취에 빠지는 값싼 믿음을 정당화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노력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실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뜻입니다.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해야만 하는 게 아닌 거와 같습니다. 그냥 들이마시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루터의 영혼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전혀 새로운 생명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아도 영혼의 자유를,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타종교인들도 우리와 동일한 확신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술가들이나 시인들도 그렇게 말할 겁니다. ‘자연인’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연에서 그런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사들은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삶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경험은 그런 것들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런 경험이 세상 사람들의 경험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 문제는 설교자의 설교만 듣고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장 궁극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기를 간구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설교자로서 최대한 설명을 해야겠기에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종종 즐기는 테니스를 예로 들겠습니다. 테니스를 즐기려면 일정한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한번 실력을 쌓았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실력에는 실제로 몸의 기술만이 아니라 마음도 포함됩니다. 테니스의 깊이로 들어갈수록 테니스가 제공하는 즐거움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운명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풍성해집니다.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의 기쁨을 느낍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기쁨입니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에서 자신의 전체 존재가 새로워지고 가벼워지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평생 전혀 흔들림 없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이 삶의 과정에서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루터는 방향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초인간적인 의지로 당시 로마가톨릭 교황과 투쟁할 수 있었습니다. 1521년 보름스(Worms)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후 변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서의 증거에 의해서나 아니면 분명한 이성에 의해서 저를 설복시키지 않는다면, -교황과 공의회는 종종 오류를 범했으며 스스로 모순에 빠진 적이 많았기 때문인데-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기에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또한 철회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역행하는 것은 저에게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시기를 빕니다. 아멘.
그가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인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는 여러분과 저도 참된 믿음만 있다면 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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