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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24: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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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953229 |
언약을 통한 생명 경험
수 24:19-25,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2017년 11월12일
19.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22.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25.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세겜 회의
구약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영웅들은 많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걸 보면 유대인들이 이 두 사람을 가장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임무를 마치고 죽을 때 후계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았고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의 역할은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임무를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목전에 이르는 데까지는 무난히 성공했지만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요단 강 동편 모압에서 120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그는 여호수아를 선택해서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맡겼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넜듯이 여호수아도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런 기적인 사건을 하나님의 표적으로 이해했습니다. 모세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여러 종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듯이 여호수아도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무난히 함락시키고 가나안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은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가나안의 여러 부족들과 상당 기간 함께 지내면서 경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계속해서 영토 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곳 원주민 부족들의 생활수준과 문명이 이스라엘 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과 정복은 지난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110세의 늙은 몸이 되어 더 이상 자신의 미션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이후의 이스라엘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세겜이라는 지역에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 상황을 수 24:1절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지방 단체장들과 정부 장관들과 법원 대표자들이 다 모인 겁니다. 그들이 회의 내용을 지파로 돌아가 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말은 이 모임이 단순히 사회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수 24:2-15절에서 긴 연설을 합니다. 백성들을 향한 마지막 유언입니다. 내용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지난 역사를 총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유역 출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곳에서 끌어내어 가나안에 거주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집트에 가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다시 모세와 아론 형제를 그들에게 보내서 이끌어냈고, 광야를 거쳐 이제 가나안에 자리를 잡아 편안히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요점은 이런 과정이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를 끝낸 다음 여호수아는 거기 모인 이들을 향해서 여호와만 섬길 것인지, 아니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이나 가나안 신을 섬길 것인지 결단하라고 요구합니다. 백성들은 당연히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예상외의 발언입니다. 당신들이 잘 선택했으니 앞으로 하나님이 복을 주실 거라는 말을 했었어야만 했습니다. 수 24:1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설교를 듣고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이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을 부정한 것입니다. 여호와만을 섬긴다는 것은 다른 신들을 버릴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다른 신들은 세상살이의 모든 안전장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궁극적인 것은 오직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삶입니다. 일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숨을 쉬면서 동시에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가나안에서 여호와만을 섬기면서 살기 힘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에서 전개된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우상숭배가 점철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가장 크게 경계한 것도 바알숭배였습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도 세상 사람과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구별되는 게 아니라 그의 영혼이 구별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말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칼 바르트 표현으로 하나님은 전적 타자이고 폴 틸리히 표현으로 ‘궁극적인 관심’입니다. 판넨베르크 표현으로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볼 수 없고 등만 본다는 모세 이야기도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 경험으로 대상을 인식합니다. 그 대상에 이름을 붙입니다. 꽃, 나무, 강과 산, 남자, 여자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대상을 범주화 하는 겁니다.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만 세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거룩하고, 전적으로 다르고, 초월적이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어렵고 믿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손에 잡히는 대상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형상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정치 경제적인 이데올로기를 신으로 섬깁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일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의 대상이 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 남녀노소 막론하고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정한 대상을 악마로 만듭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은 가나안에서 살아가야할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질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표현이 이상하게 들립니다. 질투는 보통 삼각관계에 떨어진 남녀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십계명에도 나오는 걸 보면(출 20: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은 잘 알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질투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이에게 관심이 없으면 질투를 느끼지도 않습니다. 질투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다가오기는 하지만 대상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에서는 아주 특별한 느낌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표현의 핵심은 여호와를 벗어나서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없는 상태는 바로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서 생명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실제 삶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실제 삶에서는 크게 다를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가능하면 다른 이들보다 좀더 성실하게 세상을 사는 게 차라리 현명하고 현실적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 여부를 떠나서 이렇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이 장난처럼 들립니다. 그건 근본을 잘 모르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화와 안식과 기쁨의 삶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질투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빛을 본 사람만이 어둠을 눈치 채는 거와 같습니다.
언약 공동체
여호수아의 경고에 이어서 수 24:21절에서 백성들이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그 뒤로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마치 교독문을 나눠서 읽듯이 문답을 반복합니다. 성경은 세겜 회의의 종결을 다음과 같이 보도합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였더라.
세겜 회의가 다행스럽게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만약 일부 지파가 반론을 제기했다면 상황이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단순히 의견 충돌이 아니라 내전으로 확대될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그런 충돌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하여튼 그들은 더불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율례와 법도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미 모세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수아 시대에 다시 확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는 전통이 확립된 것입니다. 이후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율법은 오늘날의 실정법과 같습니다. 한 사회가 건강하게 작동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규범이 바로 율법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키우는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서 농사를 망쳐놓았을 경우에 어느 정도를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정들이 율법에 나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도 노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율법 규정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규범들도 있습니다. 여자들은 교회에 왔을 때 머리를 흰 천으로 가려야 합니다.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취해야 할 태도나 윤리 도덕에 대한 규범들은 그 시대에 제한받습니다. 살인하지 말라와 같은 절대적인 율법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전쟁이 터졌을 때는 말이 달라집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율법을 제정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의 개별 조항은 늘 새롭게 해석되고 갱신되어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약에서 찾았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언약은 인격체 사이에서 성립됩니다. 부부 사이에 언약이 가능하고, 친구 사이에 언약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은 이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는 분이기에 어떤 조건에 의해서만 성립되는 언약에 제한받는 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은 언약을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이 모두 ‘언약’입니다. NIV 번역은 언약을 covenant라고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Bund로 번역했습니다. 두 단어 모두 비슷한 뜻으로 약속, 계약, 동맹 등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계약 공동체, 동맹 공동체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당연히 하나님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질투하신다는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질투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걸 더 축약하면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사실을 삶의 절대 기준으로 삼겠다는 결단이 바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을 허락하지 못하는 바알을 더 이상 숭배하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인 예수 그리스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 완성의 길을 허락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부단히 바알숭배의 유혹을 받았고, 그 유혹에 넘어갔듯이 오늘 기독교인들도 가나안과 같은 이 세상에서 바알숭배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종종 넘어갑니다. 이런 유혹은 죽을 때까지 떨쳐낼 수 없습니다. 그건 인간에게 숙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이 세상에서 완전한 해방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우리가 숨을 쉬고 먹고 마시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모두가 부자가 되려는 유혹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생명을 자기가 완성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우리를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유치하게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고상하게 붙잡힙니다. 어디에 속했든지 결국 아무도 자기 생명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완성하지 못한다는 말은 생명의 실체를 목격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하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최선의 길은 언약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이미 제가 말씀드렸고, 여러분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를 깊이 알고 가까이 다가가고 하나가 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은 여호수아가 세겜에 열두 지파 사람들을 모아놓고 모세를 통해서 이미 주어졌던 언약을 갱신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어도 분명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기에 종종 삶이 불안해질 겁니다. 여러분 인생에 어려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인생을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고 해도 자신의 궁극적인 미래가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서 당혹스러울 때도 많을 겁니다. 그런 거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이 안 되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삶의 짐을 제가 어떻게 간단히 해결해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 자신의 삶을 지탱해나가기도 사실은 어렵습니다. 다만 이렇게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궁극적인 생명의 언약입니다.
설교듣기: https://youtu.be/ALlFBQfzL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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